그녀는 집을 떠나고
11. 오래될 기억 오래된 기억
"니 탓이 아냐."
수가 말했다. 그녀와 나는 테니스코트 벤치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승희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나를 만나러 내가 다니는 학교로 와주었다.
"내 탓일지도 몰라..... 마지막 통화가 나였다는데... 음식을 받으러 나가는 게 아니었어."
나의 말에 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주 연락하던 사이도 아니었다며."
나는 마음이 어두워져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고?"
수가 물었다.
"충동적이었던 것 같아. 나한테 소설을 쓸 거라고 했거든."
내가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수가 말했다.
"죽은 사람이 쓰려고 했던 소설은 죽은 사람과 함께 잊히는 게 맞겠지?"
내가 말했다.
"그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수가 말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계속 기억해야 할까 봐 두려웠어."
내가 말했다.
"죽는 건 잊히는 거야. 오래된 앨범처럼 아주 가끔 들춰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수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코트에선 하양모자와 파랑모자가 시합하고 있었다. 라켓에 공이 튀며 맑은 소릴 냈다. 우린 천막이 드리워진 벤치석 뒤쪽에 앉아서 오고 가는 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유일한 관중인 우리 둘을 의식했는지 멋있게 치려 애쓰는 것 같았다.
"오래전 고등학교 때 나를 미셸이라고 부른 애가 있었어."
수가 말했다.
"미셸?"
여학생 세 명이 테니스코트 벤치석으로 들어왔다. 셋다 긴 파마머리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웃으며 들어와 우리 앞쪽 그늘 진 자리에 앉았다. 쌍둥이처럼 똑같은 뒷모습이었다. 웃음소리 파장까지 같은 듯했다. 밤의 여왕이 부르는 아리아처럼 하이소프라노의 금속성 웃음. 그들이 들어오자 하양모자와 파랑모자는 더 열심히 테니스를 쳤다.
"편지에 항상 그렇게 써서 보냈어. 나의 미셸."
그녀가 말했다.
"소름 돋는데."
내가 말했다. 그녀가 웃었다.
"처음에 편지 보낸 사람이 누군지 몰랐을 때는 누군가 그렇게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싫진 않았었거든.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일찍 등교를 하다 그 아일 보게 됐어.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가 말했다.
"남자야?"
내가 물었다.
"응."
그녀가 대답했다.
"왜 미셸이라고 부른 거야?"
"비틀스 노래 미셸 몰라?"
그녀가 말했다. ......!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걸 보면 잘 생기진 않았나 보네."
내가 말했다.
"음, 잘 생기지 않은 건 맞는데 그것 때문은 아냐. 나 말고 다른 여학생 서랍에 편지를 넣고 있었거든."
그녀가 말했다.
"바빴겠네. 편지를 두 통씩이나 쓰려면."
내 말에 그녀가 웃었다.
"동시에 둘을 좋아한다는 게 가능할까?"
그녀가 물었다.
"테니스공 두 개로 테니스를 칠 수 있으면 가능하겠지."
점점 더 격렬해지는 하양모자와 파랑모자의 테니스시합을 보며 내가 대답했다.
"한 번은 그 애가 내 서랍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넣어뒀었는데 그 책을 다른 애한테 줘버렸어. 여봐란듯이. 그 뒤로 편지가 안 왔어."
그녀가 말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어이가 없었다.
"응."
그녀가 끄덕이며 말했다.
"그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준 게 아니면..."
"아니면?"
"미친놈이지."
내가 말했다. 그녀가 당황하며 웃었다.
"설마...?"
그녀가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후로 서점에서 밀란쿤데라 책을 보면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참을 수 없는 일이야."
내가 말했다.
"그런데 엊그제 연락이 왔어. 그 애한테. 만나고 싶다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를 보았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세 명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테니스코트를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