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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안메아 Oct 14. 2024

그녀는 집을 떠나고

10. 섣부른 위로는 하지 않기로

아빠의 논문작업 돕는 일을 끝내고 나는 희원과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남지 않은 방학동안 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출입문을 열자 활짝 열린 맞은편 통창에서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통과하며 커튼을 마구 흔들고 테이블 위에 있던 먹다 남은 과자봉지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젠장! 서둘러 출입문을 닫자 바람이 좀 진정되었다. 마시다만 오렌지주스컵, 비닐을 벗기다만 LP판들과 먹다 남긴 음식들... 누군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먹던 걸 뱉어놓고 도망친 것 같았다. 한숨이 났다. 가지고 온 것들을 내려놓고 희원의 방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느린 속도로, 눈 하나가 겨우 비집고 들어갈 만큼 조금만 열고 보았다. 공포영화에서 살 가능성 0.33%의 등장인물이 길고 어두운 지하복도를 따라 걷다가 마주친 음산한 문을 열 듯....! 예상대로였다. 열지 말았어야 했다. 내장으로 들어가 혈관을 지나서 피부를 통과한 술냄새가 지속력이 훌륭한 고급 향수와 뒤섞인 채 방 안에 갇혀있다가 훅하고 내 후각을 덮쳤다. 발라당 팽개쳐져 여기저기 누워계신 옷가지들, 사용한 수건들, 뚜껑이 열린 채 책상 위에 나뒹구는 화장품들을  보고 있자니 분노가 스멀스멀 차올랐다. 온 집안의 문이란 문은 모조리 열고 널려진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세탁기를 작동시키고 청소를 하고 유리를 닦았다. 피곤함에 지쳐 더 이상 숨쉬기조차 벅찰 즈음에야 일이 끝났다. 해가 지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힘으로 샤워를 끝내고 수건을 둘둘만 채 소파 위에 쓰러졌다. 배가 몹시 고팠다. 생각해 보니 아침에 아빠집에서 먹은 아침이 전부였다. 이대로 누워있으면 과로사로 죽거나 아니면 굶어 죽거나 둘 중 하나, 아니면 둘 다. 손을 뻗어 충전 중인 휴대폰을 열고 배달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이 도착하기 전에 죽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소파에 누운 채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그 상태로 잠시 잠이 들었다가 전화소리에 잠이 깼다. 나는 꺼져가는 생명을 붙잡듯 겨우 눈을 뜨고 전화를 봤다. 승희였다. 재즈바에서 만난 이후 처음 걸려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기운 없이 전화를 받았다.


"나야. 뭐 해?"


승희가 말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내가 말했다.


"응."


그녀는 마치 내가 전화를 건 것처럼 대답만 할 뿐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무슨 일 있어?"

 

내가 물었다.


"아니, 그냥 전화해 봤어. 바빠?"


승희의 목소리가 욕실에서 받는 것처럼 울렸다.  


"조금 전까지는. 지금은 괜찮아."


내가 말했다.


"소설을 쓰려고."


승희가 말했다. 나는 끄응하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소설?"


내가 물었다.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남자와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여자가 만나서 사랑하지 않기로 하고 만나기만 하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그럼 그건 연애소설... 은 아닌 거지?"


혼란스러웠다. 연애하지 않는 연애소설은 있을 수 없으니까 연애소설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


그녀가 물었다.


"아...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혼돈의 카오스.


"그럼 왜 만난 거야?"


그녀가 나에게 따지듯 물었다.


"성적욕망?"


내가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취조당하는 기분이었다.

 

"정말 그것 때문이라고?"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식상하긴 해도 결국 사랑하게 됐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승희의 반응에 당황한 나는 짓지도 않은 죄를 자백하듯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다시 침묵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한 말 때문인가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 배달주문한 음식이 도착한 것 같았다. 울고 있는 사람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휴대폰을 내려놓고 달려 나갔다. 역시나 음식이 도착해 있었다. 음식을 안으로 들이고 달려와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 통화가 종료돼 있었다. 나는 도착한 음식들을 식탁 위에 꺼내놓으며 승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만 들릴 뿐 승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역시나...


'배달음식이 도착해서 받으러 나가느라 잠시 전화기를 두고 간 건데. 미안해.'


라고 문자를 보낼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우는 사람을 두고 배달음식을 받으러 나갔다는 말을 하는 건 좋지 않을 듯했다. 승희에게서 다시 전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음식을 먹는 내내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승희는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승희의 전화가 온 이후로 이틀 동안 한 통의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내가 음식을 가지러 가느라 승희의 전화를 팽개치고 갔다는 사실에 화를 내는 것처럼. 그리고 승희의 소식을 들은 건 사흘 뒤였다. 휴대폰에 승희의 이름이 뜨자 안도감이 들었다.


"여보세요."


반가움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시간이 흘렀으니 그날 울었던 이유를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승희 친구죠?"


굵고 탁한 중년여자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넘어왔다.


"네. 누구신지...?"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승희엄만데..."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직감적으로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은 일을 알게 될 것 같았다. 한참을 흐느끼던 승희의 엄마는 울음을 겨우 참고 말했다. 승희가 목숨을 끊었다고.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해 전화기를 가만히 들고 있었다. 왜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학생 하고 마지막으로 통화했던데 승희하고 무슨 얘기했어요? 승희가 힘들다거나 그런 말을 하던가요?"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생각을 더듬듯 말을 더듬었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배달음식을 받으러 가는 동안 승희의 전화가 끊겼다는 말을 하자 승희엄마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사과해야 했다. 하지만 위로의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걸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까. 승희엄마가 끊겠다고 말할 때까지 나는 형벌처럼 휴대폰을 귀에 댄 채 가만히 있었다.

 

"장례식엔 와줄 수 있겠어?"

 

승희 엄마가 물었다.

     

"네에."


"고마워요."


전화가 끊긴 뒤에도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속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남자와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여자가 만나서 사랑하지 않기로 하고 만나기만 하는 거야."


승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아렸다. 승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사랑이 아닌 사랑.


승희의 장례식 문자는 오지 않았다. 승희 번호로 전화를 걸어 장례식 일정을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장례식에 가지 못 했다. 며칠 후 승희의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 장례식에 와주어 고맙다는. 승희의 엄마가 나를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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