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안메아 Oct 09. 2024

그녀는 집을 떠나고

8. 누군가 그것에 대해 말한다면...

희원은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후부터 학교가 너무 멀어서 집에 오면 바이올린 연습할 기운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투덜대며 차를 사달라고 졸랐고, 아빠는 차 대신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바이올린 연습을 할 수 있는 집을 구해주었다. 하지만 희원은 바이올린 연습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코미디언이 집에 와서 웃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라고 했다.

                                           

"대학생이라면 자고로 낙제 한 번은 경험해봐야 해."


기말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일요일 아침, 시골개 마냥 뻔질나게 돌아다니던 희원이 그날은 길바닥 대신 방바닥을 굴러다니기로 작정했는지 거실을 굴러다니며 말했다.


"낙제 예정이군."


내가 말했다.


"아니기를 바라지만 어쩌면."


희원이 말했다.


"니가 낙제를 한다는 건 교수들이 제대로 가르치고 있다는 뜻이야."


내가 말했다.


"아빠가 뭐라고 하실까? 하지만 대학 때 이런 경험을 해봐야 해! 사회에 나가서 할 수 없는 경험이거든."


희원이 말했다.


"아니. 넌 맘만 먹으면 할 수 있어. 사회든 어디든. 아빠는 니가 평소에 개처럼 네 발로 기어서 집에 들어온다는 걸 아시면 다시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실 거야."


내가 말했다. 희원은 의아한 듯 눈을 굴렸다.


"네 발로 기어서 들어왔다고? 설마..."


"기억이 없겠지. 아니면 수치심이 없는 거니까."


희원은 어제 자신이 술에 취해 두 발로 걸어왔는지 네 발로 기어 왔는지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다가,


"아무튼 이건 언니 책임도 있어."


"뭐라고?!"


기가 막혔다.


"생각해 봐. 내가 기어들어오는 걸 보고도 방치해 둔 거잖아. 이건 공동책임이야. "


희원이 말했다.


"그래서?"


"아빠한테는 비밀로 하자고. 아빠의 정신건강을 위한 거야."


"웃기시네."


내가 말했다.


"아! 맞다!"


희원은 뭔가 생각난 듯 거실 소파에 던져둔 가방에서 꾸깃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학교에서 나눠주길래 가져왔는데, 이거 언니 엄마지?"


제27회 독서토론의 밤

도서명: 최지서 <어둠의 땅 저편으로>를 읽고

주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죽음의 형식

언제: 0월 0일 늦은 0시

어디서: 인문대 세미나실 … …


......!!




니체적인, 힘으로써의 초월적 삶을 그대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쇼펜하워적인 의지로써 그것을 극복하라고 말하지도 않겠다. 난 다만 그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그것 속에 오히려 침잠해 버릴 것을 권하고 싶다. 그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그것으로 자신을 내모는 것조차 엄청난  용기가  필요함을 나는 안다. 하지만 그 속으로 뛰어들지 않고선  우린 그것에 의해 서서히 부식되어 결국엔 파멸해 버릴 것이다.

… 그대,  한껏 절망하라.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아파하고 비통해하며 고통에  울부짖어라.

운명을 저주하라.

더 이상 나아갈 진창이 없을 때까지 깊이 몰락하라.

그리고 더 이상  잃어질  것이  없을  때  그대는 비로소 얻게 되리라.  

그저 눈을 감고 바닥에 두 발이 닿을 때를 기다리라.  

완벽하게 홀로 되어 고독의 한가운데에 서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홀로 남겨졌다.'가 아닌 '홀로 존재한다.'라고 부를  것이며 그제야 끈질기게 괴롭혀 오던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태풍의 눈처럼, 샤알레 속의 개구리 알처럼


최지서 <어둠의 땅 저편으로> 중에서




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가고 싶다. 나는 이 두 마음 사이를 오가며 미간을 찌푸린 채 계속 걸음을 옮겼다. 멈춰 설 수가 없었다. 멈추는 즉시 무언가를 결정해야만 할 것 같았다. 걷는 동안은 생각할 기회가 있는 것처럼 걷고 또 걸었다.

5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려 밤부터 비가 내린 보도블록 위로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쏟아지자 물비린내 섞인 덥덥한 공기가 훅 올라왔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여학생이 나를 유심히 보더니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다가왔다. 이런 경우 무언가를 아냐고 물어본 뒤 내 운명에 대해 비관적 예측을 늘어놓는 이상한 종교단체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다가오는 여학생을 피할 목적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겨 나에게 다가오는 그녀를 스쳐 지났다.


"저기!"


여학생이 나를 불렀다. 나는 못 들은 척 계속 걸었다.


"최서은 아니니?"


......?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최서은 맞지? 나 승희! 김승희!"


여학생이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김승희? 아! 김승희!' 김승희였다.


"너 이 학교 다니니?"


승희가 본 적 없는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응. 너도 여기구나."


내가 대답했다.


"아니. 난 여기서 독서토론회 있다고 해서 온 거야."


"아!......"


설마 내가 갈등하는 거기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잘 됐다. 토론회 하는 인문대 건물이 어딘지를 몰라서. 시간 되면 안내해 줄 수 있어?"


승희가 물었다.


"어... 그래."


내가 대답했다. 우리는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승희는 그동안의 내 안부를 물은 뒤 자신의 근황에 대해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한 친구를 대하듯 경청의 리액션을 하는 내 모습에서 어색함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승희는 내 기억 속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친근하고 쾌활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김승희!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그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자면 교실 뒤쪽에서 아이돌 이름을 들먹이며 숨넘어가는 무리들 곁에서 어두운 낯빛으로 책을 읽고 있던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언제나 조금 슬퍼 보였다. 내 자리에서 승희 자리까지 꽤 멀었기 때문에 대화를 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속으로 '저 애의 이름이 뭐였더라?' 하면서 무척 곤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김승희라는 이름을 듣자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학교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던 다른 반 남학생에게 수줍게 상기된 얼굴로 리본 묶인 초콜릿을 전해주던 모습... 그리고 우리 반 여학생의 손에 들려있던 자신의 초콜릿을 보고 창백해지던 표정... 이윽고 눈물이 후드득 뺨 아래로 떨어지고 교실 밖으로 달려 나가던 모습... 내 기억 속의 김승희는 그 모습이 전부였다.


"역시 좋은 학교를 왔네."


승희가 말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승희를 보았다.


"너 늘 공부만 하고 있었잖아."


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니 놀라웠다.


"그건... 친구가 없었으니까."


내가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친구가 없던 나는 공부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승희처럼 책 읽기를 즐기는 것도 아니어서 책을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기 때문에 남는 시간에 하는 거라고는 문제집을 푸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친구는 나도 없었는데."


이건 누가 더 친구가 없었는지 배틀이라도 해야 하나.


"독서토론회한다는 건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온 거야?"


내가 물었다.


"지인 동아리에서 개최하는 거라서... 와달라고 초대받았거든."


승희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승희의 표정을 보자 그 지인이 남자친구 거나 썸을 타는 남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하네. 그런 행사에 초대도 받고."


내가 말했다.


"그냥 자리 채워달라는 거겠지."


거기까지 말하고 승희는 잠시 생각하더니,


"너 최지서라는 작가 알아? 독서토론회 같이 갈래?"


......! 뇌가 정지했다. 갈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들이닥친 것이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꿈뻑였다. 생각났다. 내가 이름도 바로 떠올리지 못한 저 아이의 책 읽던 모습을 기억하는 이유는, 엄마의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색 바탕에 하얀색으로 쓰인 <어둠의 땅 저편으로>라는 글씨.

승희의 손에 들린 책에서 엄마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무언가를 들킬까 두려워하는 마음처럼 심장이 두근거렸었다. 책을 빤히 보던 나와 승희가 눈이 마주쳤다.


"이 책 읽었니?"


승희가 내게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 아니."


나는 누가 들어도 어색한 말투로 대답했다. 마치 안 읽은 책을 읽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그래?"


승희의 시선에 잠시 머물렀던 나에 대한 관심은 그 책을 읽지 않았다는 말과 동시에 실망으로 바뀌었고 다시 책으로 옮겨졌다. 이후로 승희와 대화한 기억이 없다. 만약 그때 내가 그 책 저자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아마 놀라거나 장난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놀라거나 장난이라고 생각한다는 건, 나 같은 별 볼 일 없는 아이가 최지서의 딸이라는 사실이 충격적이거나 실망스럽다는 뜻일 테니까 그녀를 놀라게도 실망하게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인문대 건물 앞에 도착하자 나는 대답했다.

 

"난 안 갈래. 독서토론회 관심 없어."


승희는 나의 거절에 살짝 실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밝은 표정으로 고맙다고 인사했고 우리는 헤어졌다. 돌아오면서 역시나 안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 예찬론자 같은 엄마의 글에 대해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게 나로선 힘들 일이 될 테니까.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엄마는 나를 혼자 두고 떠나는 것에 몹시 힘들어했다. 한참 뒤 안 사실이지만 엄마는 미국에 있는 아빠에게 연락하려고 했었다. 당시 희원의 엄마와 함께 살고 있던 아빠는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죽고 나서야 알게 된 것뿐이다. 죽음이 가장 큰 희망이었던 엄마는 나 때문에 죽음이 가장 힘든 일이 되었다. 그녀에게 나는 그토록 싫어했던 삶에 대한 집착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그녀는 집을 떠나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