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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안메아 Oct 05. 2024

그녀는 집을 떠나고

7. 어쩌면 똑똑할지도 모른다...

인생의 시간은, 글씨를 배우기 시작하고 커다랗게 칸이 그어진 공책에 글씨를 가둬 두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며 읽어야 하는 일이 시작될 무렵부터 줄 없는 A4용지에 기울어지지 않고 글씨를 써나갈 수 있기까지의 몇 년, 그러니까 몸에 꼭 맞는 옷을 사기가 불안한 시절이 지나면서 조금씩 빨리 가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삶의 수단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지고 나는 대학이라는 곳에 입학했다. 열한 살이 끝나면 열두 살이 시작되듯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희원은 그렇지 못한 듯 시험기간만 되면 내 방으로 노크도 없이 성난 짐승 마냥 들어와선,


"입시제도를 제멋대로 바꾸는 놈들은 다 죽여버려야 해!" 


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입시제도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 되려면 42.195 Km를 완주해야 한다는 법을 만들어야 해!"


나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정치인들은 기본적으로 진득한 면이 부족한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 법안은 통과되지 못해. 정치가들은 자기들이 하고 싶지 않은 건 아무것도 통과시키지 않거든."


내가 그렇게 말하자 희원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난 그녀에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엔 대학을 가든지 취업을 하든지의 두 가지 길이 있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에 어차피 취업을 해야 한다는 점으로 볼 때 그건 한 가지 길과 다름없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대학에 가기로 한 사람은 대학에 가게 된다고 말했다. 전 생애를 바치더라도... 그러자 희원의 얼굴은 어둡다 못해 창백해졌다.


"전 생애를 바친다고? 그럼 인생의 목표가 대학입학인 사람도 있다는 거야?"


희원이 물었다.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어?"


희원이 물었다. 한국에 살면서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게 신기했다.  


"넌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게 아니라 그걸 물어본 적이 없는 거야."


내가 말했다.

 

"지금껏 외운 것도 이모양인데, 만약 재수를 하게 돼서 교과서 내용이 바뀌면 난 영원히 대학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다고!"

 

희원이 울먹였다.


"네 머릿속에는 대 우주가 존재하니까 그럴 수 있어. 하지만 금세 괜찮을 거야. 우주는 순환하거든."


내가 말했다.


"무슨 뜻이야?"


그녀는 대 우주라는 말이 맘에 드는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내 뱃속과 너의 머릿속엔 대 우주가 존재해."


"왜 하필 언니 뱃속에 있는 게 난 머릿속에 있어?"


희원이 분노해서 덮친다면 어느 방향으로 피하는 게 좋을지 나는 잠시 고민한 뒤,


"왼쪽으로 결정했어."


"… …?"


"난 매일 일정량을 뱃속에 집어넣는데 나오질 않아. 그게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어."


내가 말했다.


"변비잖아."


"글쎄, 변비에도 한계상황이라는 게 있지 않을까? 장의 길이는 유한하니까."


"그래서?"


"내 뱃속엔 블랙홀이 있어서 그것들의 일부가 그곳을 통해 우주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 같거든. 4차원 공간이동 같은 거지."


"그럼 우주 어딘가에 언니의 똥이 차곡차곡 모아지고 있다는 거야?"


희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마도. 마찬가지로 네 머릿속에도 블랙홀이 있어서 그 속으로 지식들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어쩌면 모든 사람 머릿속엔 블랙홀이 있을지도 모르지. 만약 그렇다면... 니 블랙홀이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월등히 크다는 게 네 고통의 이유라면 이유랄까?"


희원은 내 말의 의미를 생각하느라 잠잠하더니

 

"언니 너는 ... 똑똑한 거 같아."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희원은 중세 귀족부인을 연상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깃털장식이 되어있는 망사모자를 쓰고 버슬 스타일의 뒤가 볼록한 드레스를 입고, 힘이 들어간 아랫배 위로  가슴과 어깨는 뒤로 젖히고 양팔은 꼰 자세로 도도한 오리처럼 걸어가는 희원의 모습은 하얀 피부에 큼직큼직하게 박힌 이목구비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심지어 괴팍하기 짝이 없는 성질머리조차도 고상한 귀족들의 손에 들려있던 채찍처럼 잘도 어울렸다. 한 번은 학교 - 불행히도 우린 고등학교까지 줄곧 같은 학교를 다녀야 했다. - 개교기념행사로 바이올린 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희원이 바이올린을 시작한 지 만 3년째 되던 해여서 그리 잘하지 못하리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름대로는 이웃집의 항의전화까지 받아가며 열심히 베토벤 로망스 2번 F장조를 연습해서 내심 기특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연주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소절을 틀리는가 싶더니 이내 피아노 반주와 돌림노래를 시작했다. 아이들의 무식함이 그땐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었던 게 누구 하나 손을 번쩍 들고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사건이 벌어졌다. 무대 바로 밑에 앉아있던 남학생 하나가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돌림노래가 시작되고부터 찬물 끼얹은 듯 조용하던 강당에 웃음소리를 흘렸던 것이다. (나는 키가 작은 편이어서 두 줄로 서면 열 번도 되지 않을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불행히도 그 광경을 목격했다.) 그러자 희원은 연주를 멈추곤, 입고 있던 드레스 앞자락을 움켜쥔 채 무대 아래로 걸어 내려와 웃고 있던 학생의 머리를 바이올린활로 '딱!' 소리가 나게  때렸다.

......!!!

이후의 일은 충분히 상상 가능하겠지만 하나 덧붙이자면 웃다가 재앙을 맞이한 남학생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 사이 희원은 "어! 내 !" 하며 바이올린  을 살폈다. 그 광경을 본 나는 웃음과 공포가 동시에 몰려들어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만약 성적만으로 학습능력을 평가하지 않는다면 희원은 어쩌면 똑똑할지도 모른다. 자신감으로 위장한 자만심으로 부정적인 세상의 공격을 모조리 방어해 내고 스스로를 자존감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성적표 담임 평가란에는 언제나 이렇게 쓰여 있는 듯했다.


'지시사항: 아버님, 한숨 쉬십시오.'

 

희원이 시한부처럼 금세라도 쓰러질 듯 연약한 표정에 파리한 입술을 하고 나타나 성적표를 건네줄 때면 아빠는 휴우-하고 길게 한숨 토하는 일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희원도 무사히 대학에 착륙했다. 거기다 성적만 고려하자면 그녀의 입시결과는 가히 기적이라고 할 만했다. 희원이 생리주기로 깨달은 세상의 불공평함이 때로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았을까. 대학생이 된 희원은 수많은 남자들의 칭송에 둘러싸여 어느 때인가부터 자신이 예쁜 얼굴에 -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 누구보다 똑똑하다고 믿기 시작했다.


"멍청한 여자는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똑똑한 여자는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해."


사악한 내가 말했다.


"정말? 그래서 난 멍청하다고 생각하나 봐."


희원이 대답했다. 남자들의 칭송이 낳은 입력값과 출력값 사이의 오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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