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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안메아 Oct 04. 2024

그녀는 집을 떠나고

6.  봄이 끝나면 여름이 시작되니까.

"울 엄만 나쁜 여자야."


내 방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숙제를 하던 희원이 말했다.


"숙제는 니 방 가서 해."


난 퉁명스레 말했다. 그 애는 언젠가부터 매일 방과후면 숙제할 것들을 싸안고 내 방으로 왔다.


"싫어. 아빠가 모르는 건 언니한테 물어보랬단 말야."


희원은 어림없다는 투로 숙제를 끄적대며 대꾸했다.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옛날에 엄마랑 심하게 다퉜을 때 아빠가 그랬어. 나쁜 여자라고."


......! 안타깝게도 나는 희원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희원은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숙제를 멈추고 빤히 봤다.


"그래서?"


나의 최선이었다. 희원은 나의 질문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시 숙제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엄마는 집을 나갔어. 개박살 난 거지."


......! 역시 저 아이의 입에선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가능하면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아야 했다.


"언니는? 언니 엄마는 좋은 엄마야?"


희원이 물었다.


......

나는 생각했다. 재혼한 남자에게 자신의 딸을 맡겨두고 가버린 엄마가 나쁜 엄마인지 아니면 살아있는 아빠를 죽었다고 하고서는 자신이 죽어버린 엄마가 나쁜 엄마인지. 심장이 아렸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머리꼭지만 간신히 창틀 아랫부분에 닿아 있었던 라일락 나무가, 이젠 2층 내 방을 적당히 가리고선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면 제법 근사한 잔영을 드리웠다. 난 사실 그것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뜰 안에 빽빽이 심긴 잔디가 누렇게 되어 있는 것을 보며 또 죽었군 하고는 성냥을 가져다가 화전민의 후예처럼 까슬까슬 잘 마른 그것에 불을 붙이고 그 불을 따라가 밟으며 괴이한 탄성을 지르곤 했다. 그즈음 희원의 온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어있던 프릴과 리본들도 잎이 떨어지기 시작한 10월의 활엽수처럼 하나둘씩 떨어져 갔다. 그리고 나에 비해 성장이 빠르던 그녀가 나와 함께  좀 더 정확히 나보다 한 살 일찍  생리를 시작하면서 잔디밭을 숱검정으로 만드는 일 따위는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저 각자의 방에 틀어박힌 채 갖은 궁상을 떨다가 두 눈 가득히 '절 좀 내버려 두세요.'라는 말을 담고서 도우미 아주머니의 잔소리를 피해 다니는 일이나, 가끔씩 열을 내가며 새로 나온 아이돌이라든지 학교에서 인기 있는 남학생들 얘길 하는 따위가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아침, 난 잠에서 문득 깨어 내가 희원의 키를 앞지르기 시작했으며 라일락 나무가 내 창 앞에 얼굴을 충분히 들이밀 만큼 자랐음을 깨달았다. 희원은 중학교 2학년 이후로 전혀 키가 자라지 않고 있다는 건 그리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날마다 아침이면 눈을 뜨자마자 내 방으로 달려들어와 거울 앞에 서서 어젯밤에 빵을 먹고 잤는데 더 뚱뚱해진 것 같지 않냐며 난리법석을 피우거나 허리가 1인치 준 것 같다며 이리저리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곤 했다. 그래서 으로 달려드는 희원을 보자마자


"오늘은 살이 조금 빠진 것 같네."


라고 미리 말해버리는 방법도 써봤지만 그리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것에 대한 확인 작업도 잊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희원아! 서은아! 밥 먹고 학교 가야지."


아빠의 부름에 희원은 거실에 있는 달력에다 열심히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핼쑥한 얼굴로 돌아봤다.


"아빠! 난 못 먹겠어."

 

"왜? 밥을 안 먹고 어떡하려고?"


주방에서 아침을 차리던 아빠가 걱정스레 물었다.


"나 그거 하는 날이어서 다 토할 것 같아."


생리통을 경험해보지 않은, 아니 생리 자체를 하지 않는 아빠는 희원이 생리통을 호소할 때마다 난감한 표정을 짓곤 했다. 게다가 희원은 월중행사가 치러질 때마다 생리주기 때문에 울분을  터뜨렸다.


"난 25일 주기인데 언니는 왜 40일 주기야? 게다가 다들 5일에서 일주일이면 생리가 끝나는데 난 왜 12일씩이나 하는 거야? 정말 끔찍하다고!"


희원이 울부짖듯 소리쳤다.


"아빠가 도움이 안 돼서 미안하다."


아빠는 희원의 울부짖음에 본인이 인간을 창조한 도 아니면서 자기 잘못인  미안해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그걸 이제 알았니?"


희원이 신을 향해 소리쳤고, 내가 그를 대신해 대답했다.     



                                    

 

"책 읽고 있니?"


일요일 오전, 라일락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정원 테이블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내게 그가 다가와 물었다. 그가 들고 있던 컵에서 적절한 무게감의 커피 향이 전해졌다.


"네."


"무슨 책인데? 재밌니?"


그가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벽> 읽고 있어요."


그가 맞은편에 앉는 모습을 보자 다른 곳으로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벽? 샤르트르?"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내가 들고 있던 단편소설집의 표지를 유심히 보았다. 1분 30초만 있다가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자리를 옮기면 그는 상처받을지도 모르니까.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타인에게 상처 주는 건 대수롭지 않아 하면서도 타인의 행동에 대해선 지나치게 민감하기 때문에 1분 30초만 참기로 했다.

 

"좋은 책이네. 어렵지는 않고?"


"어렵지도 않고 그리 좋은지도 모르겠네요."


내 대답에 그는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이다가 이내 유쾌하게 웃었다.


"점점 엄마랑 말투가 비슷해지네."


......! 그의 입에서 금기어가 발사됐다.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쓰는 단어지만 그는 다른 이유에서 나에게도 희원에게도 '엄마'라는 단어를 소리 내어 말하는 법이 없었는데 그가 그 순간 그 말을 소리 내어 말했다. 그리고 그도 나도 그 단어가 가진 위력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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