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따라왔는지 아래층 서재에 들어와 읽을만한 꺼릴 찾던 내게 희원이 대뜸 던진 말이었다. 난 책장 가득히 꽂힌 재밌어 보이지 않는 책들 틈에서 겨우 재밌을지 모를 책을 골라 꺼내려다 돌아보았다. 희원의 얼굴은 서재의 창을 덮고 있는 두껍고 자줏빛이 나는 커튼으로 반쯤 그늘이 드리워져서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
"왜?"
"여긴 아빠가 쓰시는 곳이고 책도 다 아빠 거야. 여기 들어온 걸 알면 아빠가 야단 치실 걸?"
희원의 목소리는 스스로 설득당한 것처럼 뒤로 갈수록 더욱 당당해졌다.
"괜찮다 셨어."
난 다시 빽빽하게 꽂힌 책들 틈에서 그걸 빼내려고 손에 힘을 줬다.
"만지지 말라고!"
그 아이의 목소리 끝에서 쇳소리가 났다. 난 대꾸 없이 책에 손을 고정시킨 채 그 앨 돌아봤다. 그리고 무언가 둔탁한 물체가 오른손 엄지 아랫부분에 부딪혀 살갗을 벗겨놓은 후 바닥으로 떨어졌다. 책이었다. 난 희원의 손으로부터 날아와 네 손에 부딪힌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벗겨진 살갗이 붉어졌다.
"내 거야! 이 집에 있는 건 다 내 거라고!"
그 애의 목소리가 떨렸다. 난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주워서 희원을 봤다. 그 아이는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몹시 분노스러운 듯 거친 호흡을 뱉으며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책을 던지려고 어깨 위로 들어 올리자 희원은 조금 전까지의 확신에 찬 분노의 표정이 일순간 사라지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 설마 나한테 던질건 아니지?"
그 애가 물었다.
"틀렸어."
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나한테 책 던진 거 알면 아빠가 너 내쫓으실걸."
희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바라는 바야. 난 아무 곳에도 있고 싶지 않거든."
나는 제대로 던지기 위해 책을 든 손에 힘을 주고 어깨를 뒤로 젖혔다. 투수의 그것처럼. 그 애의 시선은 내 오른쪽 어깨 위의 허공으로 한껏 들어 올려진 그것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빠한테 꼭 말해. 이 책으로 니 머리통을 날릴 거니까."
하고 책을 던지려는 순간,
"자,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희원은 두 손으로 머리통을 감싸며 소리쳤다.
머리가 이상한 사람은 이상할 정도로 머리를 아낀다. 머리 좋은 사람이 머리를 아끼지 않고 쓰는 것과 비교하자면 역시나 이상한 머리를 가졌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쥐고 있던 책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주워서 제자리에 갖다 놔."
책을 읽을 마음이 사라진 나는 책 꺼내기를 포기하고 서재를 나왔다.
그날 희원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베토벤 비창을 서른 번쯤 쳐댄 후 미친 듯이 울어댔다. 얼마나 울었는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모였을 때 희원의 눈은 퉁퉁 부어 제대로 떠지지조차 않았다.
"울었어? 눈이 왜 그래?"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희원은 퉁퉁 부은 눈으로 내 쪽을 쳐다봤다. 그가 나를 봤다.
"말해."
내가 말했다. 희원은 입술을 꾸물대며 무언가 말할 듯하더니,
"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라며 숟가락으로 음식들을 입속에 욱여넣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는 희원을 위로하려고 애썼지만 희원의 말뜻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아이는 그저 나와 같이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는데 말이다. 그날 저녁은 유례없이 밥이 모자라 도우미 아주머니는 그의 눈치를 보며, "어쩌지? 밥이 모자라네."라는 말만 연발했고 희원은 한밤중에 배가 아프다더니 새벽에 결국 응급실 신세를 져야 했다. 그렇게 이틀을 입원한 뒤 돌아와선 그 애가 나에게 했던 첫마디가 이거였다.
"언니!"
......!
"나보다 한 살 많으니까 언니라고 부를게."
역시나 머리가 이상한 아이였다.
내가 전학 간 학교는 집에서 20여분 거리에 있었다. 그는 내게 희원과 같이 등교하라고 말했지만 난 그 요구가 좀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온통 프릴과 리본으로 뒤집어쓴 그 애와 같이 다니는 건 여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문을 나서자마자 혼자 내빼곤 했다.
"언니! 천천히 가!"
구두 또각 대는 소리가 점점 느려지며 뒤로 밀려나면, 어김없이 부름은 원망에 가득 찬 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언니이!"
나는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멀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 내뺐다. 미처 몸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이산화탄소가 귓불까지 차올라 뻥하고 온몸이 산산조각 나버린다고 해도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교문 앞에 도착한 후에야 뒤를 홱 돌아보면 저만치서 리본 한 묶음이 지친 듯 따라오기를 포기하고 미적미적 걸어오는 게 보였다. 희원은 눈물까지 흘리며 그에게 나의 만행(?)을 일렀지만 그는 웃을 뿐 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그 아이는 심통 난 얼굴로 집을 나서자마자 앞서 내빼기 시작했다. 살짝 찝찝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오늘은 여유 있게 걸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콧노래가 나왔다. 그동안 급히 가느라 보지 못했던 등굣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 햇살이 내려앉은 초여름 나무들로 마음이 설레었다. 나는 그늘을 따라 걸으며 음악시간에 배운 동요 한 소절을 흥얼거렸다. 등교하는 아이들이 풍경이 되어 시야에 잡혔다. 쌩하고 바람소리가 나도록 앞서 가버린 리본뭉치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행복했다. 하지만 역시나 행복은 길지 않은 법! 학교를 향한 길이 끝나갈 무렵 새로 생긴 브런치 카페 간판 뒤에서 리본뭉치가 불쑥 튀어나왔다.
"언니!"
......!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다. 난 대꾸 없이 빠른 속도로 그 아이를 지나쳐 내빼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원망 섞인 부름이 내 뒤를 쫓았다
"같이 가! 씨이 나쁜…! 최서은! 너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그랬다. 나는 최서은이다. 아빠는 안재훈인데. 나는 최서은이고, 친아빠가 아니지만 희원은 안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