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시작되자 나와 희원은 아빠가 계시는 집으로 돌아왔고, 희원은 일주일쯤 그곳에서 지내다 공부할 게 많다는, 누구도 심지어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할 핑계를 대며 또 다른 집으로 돌아갔다. 지난 학기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빠의 흰머리는 더 늘어서 예전처럼 흰 머리카락 하나에 100원씩 해서 뽑아버리면 그는 빈털터리 대머리가 되어버릴 거였다.
"서은아! 바쁘니?"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있던 내게 그가 물었다.
"바쁘진 않은데요."
오후에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오랜만에 부탁을 하려는 것 같아서 거기까지만 말했다.
"그럼 아빠 일 좀 도와줄래?"
대학 선생 일을 하고 있는 그의 일이라니 생각보다 골치가 아플 것 같아 잠시 망설였다.
"아르바이트하는 셈 치고 내 논문정리 좀 도와줬으면 하는 데…."
역시 돈의 힘은 위대했다. 나의 마음이 그를 돕겠다 소리쳤다. 어쨌든 나는 일을 할 생각이었으므로 아빠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그의 주머니에 든 것들을 내 주머니로 옮기는데 동의했다. 그래서 읽고 있던 책을 내던지고 그를 따라나섰다. 방학이라 강의가 없음에도 그는 찌는 무더위를 모욕하듯 긴 양복바지, 아이보리색 반팔 드레스 셔츠에 넥타이까지 매고 학교로 향했다. 차에 시동을 걸자 나무둥치 어딘가에 붙어있던 매미가 차시동소리를 이기려고 허공을 향해 꾸엑엑엑!하는 소리를 쏘아 올렸다.
"매미소리 한번 시원하다."
......! 더워 미칠 것 같은 지금이 여름의 한가운데라는 걸 알리려 있는 대로 소리치는 저 곤충의 울음 어디가 시원하다는 건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처럼 그와 나는 학교까지 가는 동안 대화가 없었다. 누군가 그랬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관계가 가장 이상적인 관계라고. 아빠와 나는 이상적인 부녀관계였다.
연구실에 도착하자 커다란 눈을 가진 커다란 키의 깡마른 여학생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 그녀의 이름은 수였다. 그녀는 내 이름을 듣자 안교수의 딸이 '최'서은이라는 게 의아한 표정이었다. 어색한 인사가 끝나자 아빠는 나와 수에게 할 일을 주었다. 나는 아빠가 적어준 책이나 논문들을 찾아서 그가 바로 확인할 수 있게 해 주거나 오탈자를 확인하는 단순한 일을, 수는 보다 전문적인 보조업무를 맡았다. 그 일을 하는 동안 그녀와 나는 제법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나는 그녀가 맘에 들었다. 그녀는 나보다 두 살 연상이었고 조용한 편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대신 내가 하는 이야기들을 재밌게 들어주었다. 그녀는 근로장학생으로 그가 가르치는 전자공학과 학생이었는데 오가는 학생들 모두가 그녀를 알고 있었다. 가끔은 그의 연구실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 일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연구실로 빠짐없이 출근했다.
"왜 안 물어봐?"
내가 물었다.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으며 연구실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뭘?"
그녀가 햇빛에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안교수 딸이 왜 안서은이 아니고 최서은인지."
내가 말했다.
"말할 때가 되면 말하겠지 했어."
그녀가 말했다.
"끝까지 말 안 하면?"
"흠, 그건 말할 필요가 없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거니까 물어볼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좋아. 좋은 태도라고 생각해."
내가 말했다. 그녀가 웃었다.
"자, 이제 말하고 싶은 거 같으니까 물어봐줄게. 두 사람은 왜 성이 다른 거야? 엄마성을 따른 거야? 아님 친아빠가 따로 있는 거?"
그녀가 물었다.
"엄마성을 따른 거. 다다익선이라지만, 아빠는 한 명이면 될 거 같아."
내가 대답했다.
"거 봐. 놀랍지 않잖아. 이걸 꼭 물어봐야 했어?"
그녀가 말했다.
"처음에 들었을 때 놀랐잖아."
"내가?"
그녀는 처음 인사하던 순간을 기억을 못 하는 듯 놀라며 물었다.
"응."
내가 대답했다.
"그랬구나. 기분 나빴으면 사과할게."
그녀가 말했다. 기분이 나빴었나? 아니 그것보다 조금 불편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내 그런 감정은 사라졌었다. 그녀는 흔히 말하는 매력적이라거나 혹은 깊이 있다거나 하는 것과는 다른 무엇이 있었는데, 마음속 이야기를 하고서도 혼자 이야기를 한 것처럼 찝찝하거나 불편함이 없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나무' 같았다. 마르고 큰 키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사이프러스 나무와 닮은 데가 있었다.
"다시 연락 왔어?"
그녀가 물었다.
"누구?"
"승희라고 했나? 독서토론회 가려다가 만났다는 중학교 때 친구."
"응. 만났어. 며칠 전에."
내가 대답했다. 승희는 독서토론회가 끝난 다음날 내게 문자를 보냈다. 만나자고. 그래서 기말고사가 끝난 오후 우리는 '스탄게츠'라는 90년대 풍의 재즈바에서 다시 만났다.
"난 네가 책 같은 건 아예 안 읽는 애인 줄 알았어."
그녀가 버번을 홀짝이며 말했다.
"안 읽어. 여전히."
다크 그린으로 칠해진 내부를 둘러보며 내가 대답했다. 예상했겠지만 그곳을 약속장소로 정한 건 승희였다. 나는 재즈라고는 루이 암스트롱과 리 오스카 밖에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곳을 알리 없었다.
"이것도 재즈니?"
음악이 바뀔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하는 나를 그녀는 한심한 듯 쳐다봤다. 희원이 수학문제를 물어볼 때 나도저런 표정이었을 것이다. 역시 씨는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재즈바니까."
그녀가 앞으로 나올 내 질문들까지 모조리 한 구덩이에 쑤셔 넣으려는 듯 대답했다.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물어보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는 리액션을 했다.
"언제부터 나와 살았니?"
그녀가 물었다.
"동생이 대학 들어오고 한 달쯤 뒤부터."
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술 잘 못해?"
맥주를 홀짝이는 나를 보더니 그녀가 물었다.
"음미하는 거야. 누군가 정성으로 만들었을 테니까 단번에 마셔 없애긴 그렇잖아."
내가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승희가 웃었다.
"너 샤알레 속의 개구리알이 뭔지 아니?"
취기가 제법 오른 승희의 입에서 엄마 책 이야기가 나왔다.
샤알레 속의 개구리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술을 이것저것 섞어 마시다가 취기가 오른 승희는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여류작가의 운명과 작품에 대해 황홀한 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하지만 네가 아직도 최지서 책을 읽지 않았다니 유감이다."
"......"
한참이나 이야기를 쏟아내던 그녀는최면이라도 걸린 듯 멍하니 맥주를 보고 있는 내가 실망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내 말 이해하겠어? 샤알레 속의 개구리 알 말이야."
그녀가 질문하는 사이 음악이 바뀌었다.
"이것도 재즈야?"
내가 물었다.
"아니.... "
그녀는 대답 뒤에 한숨을 쉬었다.
"넌 정말... 얼터너티브 하다."
술에 취한 그녀의 표정 뒤로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이 흘렀다. 마치 이유 없이 미쳐버린 사람에게 하얗고 동그란 알약을 주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