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악!"
토요일 이른 아침, 희원은 조용한 주택가의 공기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엄마와 통화를 한 게 틀림없다. 나는 거실로 나가 희원이 방을 살폈다. 희원의 엄마는 미국 중부 시골에서 은퇴한 야구선수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는데 또 그 연애가 마음 같지 않은 걸까? 오늘은 또 무슨 얘기를 한 건지 희원의 분노 섞인 울음소리가 닫힌 방문 밖으로 또렷하게 들렸다. 평소의 희원이라면 '샤콘느'를 틀고 휴지로 눈물을 훔치며,
"나는 예술가의 운명을 타고난 걸까? 맞아, 그럴 거야. 어쩌고 저쩌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희원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울음도 멈추지 않았다. 평소처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방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희원은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움켜쥔 채 치욕스러운 감정을 배설하듯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내가 물었다. 하지만 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가 뭐래? 왜 그러는데?"
내가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희원은 머리카락을 꽉 움켜쥔 채 부르르 떨었다.
"다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희원이 말했다.
"다들 죽어, 당장은 어렵겠지만."
내가 말했다. 내 말을 듣자 희원은 울음을 잠시 멈추었다. 그걸 위로라고 하냐고 더 화를 내거나 기분이 조금 나아지거나 둘 중 하나겠지.
"차라리 엄마가 없는 게 나을 것 같아."
희원은 울음이 그치지 않아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왜 그렇게 분노하며 우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어."
희원이 말했다. 나는 방문을 닫고 겉옷과 지갑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공기가 차가웠다. 산책이나 할까 했는데 딱히 공원까지 가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 보니 낯선 골목에 이르러 공중전화부스가 나타났다. 공중전화부스라니!
"아! 핸드폰!"
나는 그제야 휴대폰을 집에 두고 나왔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공중전화를 보는 순간 저걸로 전화를 걸 수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지갑을 열어 동전을 꺼내 공중전화 동전구멍에 넣자 신기하게도 '뚜우-'하는 연결음이 들렸다. 세상에!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번호를 누르려고 했지만 기억나는 전화번호가 없었다. 휴대폰이 있어야 저장된 번호를 볼 수 있을 텐데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휴대폰이 있다면 무거운 공중전화 수화기를 붙들고 정지상태로 전화를 걸 필요가 없을 테니까. 나는 기억을 더듬어 수의 번호라고 생각되는 번호들을 천천히 눌렀다. 만약 모르는 목소리가 전화를 받으면 재빨리 끊으면 된다. '뚜우' 신호연결음이 들리자 심장이 쿵쾅댔다. 과연 수가 전화를 받을 것인가?
"여보세요."
수였다! 수의 목소리와 동시에 투둑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난데! 어디야?"
전화가 언제 끊어질지 몰라 다급하게 말했다.
"집. 넌 어디야?"
"나 지금 밖인데 이거 공중전화라서 빨리 말할게. 지금 만날 수 있어?"
내가 물었다.
"공중전화? 그 귀한 걸 어디서 찾았어? 그럼 지금 나랑 공중전화로 통화하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응."
그녀가 나오지 말지 빨리 대답해 주길 바랐다. 왜냐면 발이 시렸기 때문이다. 겉옷은 가지고 나왔지만 양말은 신지 않은 맨발의 슬리퍼 차림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양말을 신고 나오고 싶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면 나오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래. 그럼 어디에서 볼까?"
수는 공중전화부스를 보고 싶다며 이곳으로 오겠다고 했다. 거기가 어디냐고 묻는 수의 질문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잠시 생각해야 했다. 집에서 나와 공원이 아닌 쪽으로 한참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나는 집 근처 지하철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양말과 제대로 된 신발이 필요했다. 만약 수가 사는 동네로 오라고 했다면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지하철을 탔을지도 모른다. 수가 불쌍한 나를 위해 양말을 가지고 나오겠다고 했을 테니까. 하지만 내겐 수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있고 집에는 혼자 있고 싶어 하는 희원이 있으므로 재빨리 양말만 신고 나올 생각이었다. 집에 들어가자 희원은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디 갔었어?"
희원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두덩이에 얼음팩을 꾹 누르며 나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냥 돌아다니다 왔어. 나갈 거야?"
내가 말했다.
"응. 하씨 눈이 부어서... 운 거 티 나지?"
희원이 얼음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괜찮아. 늦게까지 술 마셔서 부은 줄 알 거야."
내가 말했다.
"그런가?"
희원은 반신반의하며 거울로 아래위를 살폈다.
"갔다 올게."
희원은 아무 일 없었던 듯 집을 나섰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다 어떻게 지나갔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각자의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나대로 희원은 희원대로 각자의 엄마를 견디고 있었다. 중요한 건 견딘다는 사실이다.
오늘 아침 내가 사용한 공중전화를 본 수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했다. 공중전화의 실존이 하루동안 두 명에게 큰 감명을 준 것이다.
"집에 먹을 거 있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오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 아님 뭐라도 사서 갈까?"
수가 물었다.
"걱정 마. 집 냉장고에 밀키트가 가득이야."
내가 말했다.
"밀키트를 왜 그렇게 많이?"
"배달음식에 트라우마가 있잖아. 배달음식을 받느라 통화가 끊기면 안 되니까."
내가 대답했다. 그녀가 웃었다.
"그 남자는 만났어?"
내가 물었다.
"그 남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내 대답에 수가 까르르 웃었다.
"만났어. 그래서 더 우울한가?"
수가 말했다.
"설마 사귀기로 한 건 아니지?"
내가 물었다.
"아직은."
수의 대답에 내 귀를 의심했다.
"아직이라고? 설마 언젠가는 사귈지도 모른다는 뜻이야?"
내가 물었다.
"사람 일은 알 수 없잖아. 무엇보다 나는 좀 불행해져야 할 것 같아. 그렇다면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수가 대답했다.
"적당한 불행이 필요하다면 연애는 좋은 선택이 아냐. 엄청 불행해질 테니까."
내가 말했다. 수가 다시 웃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왜 자꾸 기대할까? 그 기대가 충족되지 못할 게 뻔한데… 바람은 끝이 없고…. 아니, 이건 내 짧은 생각이고. 모르겠어. 그 앨 왜 만났는지도."
그녀는 한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외로운 건 어쩔 수 없어. 심장이 내 몸통 안에 있는 것처럼 몰라도 알아도 그건 우리 안에 늘 존재해. 문제는 다른 사람은 그게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지."
내가 말했다.
"다른 사람은 그게 없는 것처럼 느껴져."
수가 말했다.
"심장 없이 살 수 있다면 가능할 수도."
내가 말했다.
"심장을 주문하면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로 딸려온다는 거?"
수가 말했다.
"모르는 것처럼 말하네."
내가 말했다.
"내가 졌다. 인정할게. 하지만 오늘은 그 외로움, 그 절망 다 온전히 나만의 것인 양 느끼는 거 이해해 줘."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 따윈 만나지 말라고. 언어에 의한 물리적인 단절감 보다 화학적 단절감이 훨씬 강력하다고. 같은 나라 말 하는 사람이랑 대화 안 되는 게 더 힘든 거 몰라?"
내가 말했다.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사람중독인가 봐."
침묵을 깨고 수가 말했다. 대답하지 않았다.
"편지 받았어."
수가 말했다. 참!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하지만 뭐라고 썼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엔 내가 너를 모르는 만큼 너도 너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고 생각해. 넌 아주 인간적인 아이고 여린 아인데 넌 그걸 거부하고 너 자신을 비인간적으로 몰아가고 있어. 나는 네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믿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너 자신을 위해서 너 자신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것들을 자유롭게 풀어 주라고 얘기하고 싶어."
수가 말했다. 도대체 내가 편지에 뭐라고 쓴 걸까? 애써 기억을 더듬었다. 한 줄의 필름이 눈앞에 지나갔다. 햇빛에 노출되어 새까맣게 타 버린 필름이.
"이것도 내 바람인데 네 주위의 모든 해악한 인간들, 나쁘고 저질이고 단순한 사고로 연명하는 일체의 삶들이 사라지고 예쁘고 착하고 열심히 살고 그래서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게 그런 사람만 너를 둘러싸 보호하고 살았으면 좋겠어. 딱 3년만. 왜냐면 필요악이란 것도 있으니까."
수가 말했다. … ….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편지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집으로 와서 나는 수에게 대접할 파스타를 만들었다. 그녀는 내가 파스타를 만드는 동안 식탁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어제 봤다는 영화 이야기를 했다.
<사랑과 추억>
"몹시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바브라 스트라젠드가 주연도 하고 감독도 한 영화인데 하마터면 온통 다른 데 신경 쓰면서도 공부한다고 폼 잡다가 놓칠 뻔했다. 너도 봤으면 좋겠어."
나는 대답대신 고갤 끄덕였다.
"공부가 안돼. 졸업이 다 돼가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녀는 베란다로 걸어가 도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내려놨다 했다.
"너무 오랫동안 숨겨왔어요. 실컷 울어 버리세요. 눈물은 고통을 주지만 결국은 그것을 해소시켜주기도 하죠.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렇게 울어 버리세요. 그것들이 멀리 가게. 멀리로 멀리로 가 버릴 거예요. 멀리로 갈 거예요. … 그렇게 말해."
그녀의 뒷모습-나는 파스타를 만드느라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이 사뭇 진지했다.
"어떻게 생각해?"
"뭘?"
"운다는 거 말이야."
그녀가 물었다.
"울고 싶은 거야?"
내가 물었다.
"네가 있으니까 그러지 않아도 될 거 같아."
그녀가 말했다.
"말도 안 되고 이해도 못 시킬 얘길 넌 들어주니까. 그래도 두 눈 반짝이고 들어주니까."
그녀가 말했다. 들어준다는 건 분명 힘든 일이다. 숙취가 가시지 않아 전두엽에 커다란 추를 달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도 들리는 대로가 아니라 들리지 않는 것도 들어야 하는 일이니까.
내가 파스타를 그릇에 담는 동안 그녀는 바흐의 프렐류드 LP를 찾아서 플레이어에 올려놓았다.
"페르디난트 아베르라는 사람을 위해 썼대."
그녀가 말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을까?"
내가 말했다.
"왜?"
그녀가 물었다.
"언젠가는 실망시킬 테니까."
내가 말했다.
"실망시키지 않을 수는 없나?"
그녀가 물었다.
"없어."
내가 말했다. 온 집안이 첼로의 분산화음으로 가득 찼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희원이었다.
"여보세요."
희원이 뭐라고 했지만 음악소리가 커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내가 다시 물었다.
"늦는다고! 무슨 음악소리가 그렇게 커?"
희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 뒤에서 댄스음악이 이곳 소리와 맞먹을 만큼 크게 들렸다.
"크게 틀어 놨으니까. 내일 봐."
내가 말했다.
"오늘 들어갈 거야."
희원이 말했다.
"있다 봐."
전화를 끊고 오디오 볼륨을 줄이자 베란다 난간에 기대 서있던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동생?"
난 고갤 끄덕였다.
"새삼스럽긴."
"뭐가?"
"전화 왔길래, 일찍 온다는 줄 알았지 뭐야. 그런데 늦는대. 새삼스럽잖아."
그녀는 고갤 끄덕였다. 파스타를 먹은 뒤 그녀는 다시 커피를 마셨고 함께 전철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전철역 승강장 게이트에 다다랐을 무렵 그녀가 말했다.
"떠나야겠어."
난 그녀를 봤다.
"어차피 사랑 같은 거 해봐도 시간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거야. 너도 알게 되겠지만…."
"어디로?"
내가 물었다.
"안드로메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언제?"
내가 물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녀가 말했다.
"가면 찾을 수 있을까?"
내가 물었다.
"어쩌면."
그녀가 답했다.
"내일 같은 것일 수도 있어. "
내가 말했다. 지하철이 곧 도착한다는 알림이 울렸다.
"갈게."
그녀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모습이 계단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곳에 계속 서 있었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늘 해오던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