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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안메아 Oct 20. 2024

그녀는 집을 떠나고

12.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법

"아악! 엄마 때문에 미칠 것 같아!"


토요일 이른 아침, 희원은 조용한 주택가의 공기를 흔들며 머리채를 움켜잡고 방에서 튀어나왔다. 엄마에게 전화가 오고 나면 항상 저랬다. 


"제정신이야?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냐고?!"


희원의 엄마는 지금 미국 중부 시골에서 은퇴한 야구선수와 함께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또 그 연애가 마음 같지 않았던 걸까? 무슨 소릴 한 건지  희원은 분노를 못 이기고 미친 듯이 울어댔다. 평소의 희원이라면 '샤콘느'를 틀고 휴지로 눈물을 훔치며, 


"나는 예술가의 운명을 타고난 걸까? 맞아, 그럴 거야. 어쩌고 저쩌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무슨 일인데?"


내가 물었다. 평소답지 않게 걱정하듯 물어보자 희원은 기다렸다는 듯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맘마미아의 주인공이 된다면 어떨 거 같아?"


"맘마미아?"


"생물학적 아버지의 후보가 셋이라고 하면 어떨 거 같냐고?"  


희원이 다시 울먹이며 물었다. 


"후보라면 설마 그게 누군지 모른다?" 


당혹스러운 질문에 나는 당혹스럽게 되물었다.


"그런데 그 세 명도 아닐 수 있다면?"


희원의 눈을 보았다. 헐...! 희원의 엄마는 희원이 누구 자식인지도 모르는구나! 


"그 얘기는 왜 하신 거야?"


내가 물었다.


"그중에 한 명이 곧 죽는대. 죽는 한 명이 돈이 많나 봐. 그래서 나한테 유전자검사를 받으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다들 죽어버리라고 해!"


......! 희원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살다 보면 '이해'라는 단어가 무색한 사람들이 있다. 아니, 생각보다 많다. 희원의 엄마도 그중 한 명이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그러니까 괜찮은 거야."


내가 말했다.


"무슨 뜻이야?"


희원이 호흡을 가다듬으려는 듯 울음을 잠시 멈추고 물었다.


"너 말이야. 아빠가 누군지 몰라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


"아빠가 누군지 알아도 별 수 없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알아서 좋을 게 없는 건 모르는 게 나아."


내 말을 누군가가 들었다면 이걸 위로라고? 하며 나에게 눈을 부라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원은 내 말을 이해한 듯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그렇게 생각해?"


희원이 물었다.


"응. 괜찮다고 생각해. 넌 일찍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돼."


내가 말했다. 희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기엔 할 일이 너무 많은 걸."


희원이 말했다.


"지구에 존재하는 나쁜 술들을 없애느라 수고가 많다."


내가 말했다. 희원이 웃었다. 적절치 못한 위로였지만 희원에게는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유전자 검사를 받아야 할까?"


희원이 물었다. 


"그 죽어간다는 누군가의 유산을 받으려고?"


내가 물었다.


"엄마가 원하니까."


희원이 말했다.


"아마 아닐 거야."


내가 말했다.


"어떻게 알아?"


"니네 엄마가 정말 그 돈 많은 사람이 네 아빠라는 확신이 있었으면 지금 아빠에게 맡기고 가지 않았을 걸."


내가 말했다.


"나를 맡겼을 때는 가난뱅이였을 수도 있잖아."


희원이 대답했다.


"생각보다 똑똑하네."


내가 말했다.


"당연하지."


희원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삶에서 단순함이 진지함을 이기는 순간은 생각보다 많다. 




"나 자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나도 남 같기를 바란다는 거야. 그런 데서 작은 충돌과 오류를 범하지. 그래도 아직은 미련이 남았는지…. 오늘은 정말 쌍코피 터진 기분이다."


휴대폰을 받자마자 수가 불쑥 꺼낸 말들이었다. 난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다.


"오늘은 배달음식 올 거 없어?"


수가 말했다. 한숨.


"배달시키지 않으려고 밀키트를 냉장고에 가득 채워뒀어." 


내가 대답했다.


"훌륭하네."


"그 남자는 만났어?"


내가 물었다.


"그 남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내 대답에 수가 까르르 웃었다.


"만났어. 그래서 더 우울한가?"


수가 말했다. 


"설마 사귀기로 한 건 아니지?"


내가 물었다. 


"아직은."


수의 대답에 내 귀를 의심했다.


"아직이라고? 설마 언젠가는 사귈지도 모른다는 뜻이야?"


내가 물었다.


"사람 일은 알 수 없잖아. 무엇보다 나는 좀 불행해져야 할 것 같아. 그렇다면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수가 대답했다.


"적당한 불행이 필요하다면 연애는 좋은 선택이 아냐. 엄청 불행해질 테니까."


내가 말했다. 수가 다시 웃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왜 자꾸 기대할까? 그 기대가 충족되지 못할 게 뻔한데… 바람은 끝이 없고…. 아니, 이건 내 짧은 생각이고. 모르겠어. 그 앨 왜 만났는지도."


그녀는 한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외로운 건 어쩔 수 없어. 심장이 내 몸통 안에 있는 것처럼 몰라도 알아도 그건 우리 안에 늘 존재해. 문제는 다른 사람은 그게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지."


내가 말했다.


"다른 사람은 그게 없는 것처럼 느껴져."


수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심장 없이 돌아다닌다면 그게 없을 수도." 


내가 말했다.


"확신해?"


수가 말했다.


"모르는 것처럼 말하네."


내가 말했다.


"내가 졌다. 인정할게. 하지만 오늘은 그 외로움, 그 절망 다 온전히 나만의 것인 양 느끼는 거 이해해 줘."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 따윈 만나지 말라고. 언어에 의한 물리적인 단절감 보다 화학적 단절감이 훨씬 강력하다고. 같은 나라 말 하는 사람이랑 대화 안 되는 게 더 힘든 거 몰라?"


내가 말했다.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사람중독인가 봐."  

 

침묵을 깨고 수가 말했다. 대답하지 않았다.

 

"편지 받았어."


수가 말했다. 참!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하지만 뭐라고 썼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엔 내가 너를 모르는 만큼 너도 너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고 생각해. 넌 아주 인간적인 아이고 여린 아인데 넌 그걸 거부하고 너 자신을 비인간적으로 몰아가고 있어. 나는 네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믿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너 자신을 위해서 너 자신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것들을 자유롭게 풀어 주라고 얘기하고 싶어."


수가 말했다. 도대체 내가 편지에 뭐라고 쓴 걸까? 애써 기억을 더듬었다. 한 줄의 필름이 눈앞에 지나갔다. 햇빛에 노출되어 새까맣게 타 버린 필름이.


"이것도 내 바람인데 네 주위의 모든 해악한 인간들, 나쁘고 저질이고 단순한 사고로 연명하는 일체의 삶들이 사라지고 예쁘고 착하고 열심히 살고 그래서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게 그런 사람만 너를 둘러싸 보호하고 살았으면 좋겠어. 딱 3년만. 왜냐면 필요악이란 것도 있으니까."


수가 말했다. … ….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편지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오늘 뭐 해?"


수가 물었다.


"글쎄, 책이나 읽겠지."


내가 대답했다.


"만날까?"


수가 물었다.


"모레쯤."


내가 대답했다.


"오늘은 안돼?"


수가 물었다. 오늘은 나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했다. 휴대폰을 내려놓자 시계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소파 위에 드러누웠다. 희원은 아직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우린 간밤에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와 오징어로 새벽 2시까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셨다. 그 이후로 나는 뻗었으니까 희원은 몇 시까지 마셨는지 알 수가 없었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맥주병 아홉 개가 바닥에 드러누워 일제히 이렇게 소리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술 더 가져와!' 

어디서 들어왔는지 파리 한 마리가 성가시게 돌아다녔다. 술기운이 가시지 않아선지 파리채로 내려칠 기운조차 없었다. 손으로 몇 번이고 저리 가란 뜻을 비쳤지만 놈은 좀체 알아먹지 못했다. 파리란 그런 존재들이다. 손을 휘휘 젓는 게 가란 뜻인지 오란 뜻인지도 모르는…. 희원은 오후 2시가 되어서야 스멀스멀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얼굴이 어찌나 퉁퉁 부었는지 "음-" 하고 양쪽 볼에 힘을 주면 모공 사이로 5%의 알코올이 지르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다섯 병 삼분의 일 쯤 마셨어."


그녀가 늘어진 테이프처럼 말했다.


"그럼 내가 세 병하고 삼분의 이를 마셨나?"


"아니, 언닌 세 병하고 삼분의 일쯤 마셨는데 그중 절반쯤은 토했어. 기억나?"


"그랬군."


그 토사물들이 변기 위로 둥둥 떠 있던 모습이 가물가물 떠올랐다. 치즈머핀도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손으로 머릴 슥슥 쓸어 올리고는 욕조로 들어갔다. 난 눈을 감았다. 욕조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가 몽롱한 의식 속으로 스멀스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무엇들이 희번덕 스쳐가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눈을 슬그머니 떠 시계를 봤다. 세 시 삼분. 희원이 죽으려고 욕조에 물을 받아 놓지 않았다면 벌써 나왔을 것이다. 휴대폰 벨이 여섯 번째 울리고 있었다. 희원은 죽었거나 나갔을 것이다. 나는 손을 뻗어 50kg짜리 역기를 들어 올리듯 천천히 그리고 아주 무겁게 그것을 들어 올렸다. 


"여보세요."


내 목소리가 뱃고동 소리처럼 머리 안에서 울렸다.


"나야."


그녀였다. 수.

 

"자고 있어?"


길거리인지 차 지나는 소리가 들렸다.


"응. 어딘데?"


졸려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네 집 근처"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난 눈을 떴다.


"어떻게 왔어?"


"전철 타고."


"어디라고?"


"말했잖아. 너희 집 근처라고."


"와, 그럼."


"그래."


수화기를 놓자마자 나는 희원의 부재확인을 위해 목청을 높여 그녀를 불렀다.


"안희원!"


베란다 틈새로 들어온 바람에 블라인드가 착착 대며 부딪혔다. 집 안에 나와 파리 말고 살아있는 생명체는 없는 것 같았다. 욕실 안을 살폈다. 더운 공기가 빠지지 않고 숨어 있다가 내가 물을 열자마자 훅 하고 밀려 나왔다. 환기를 위해 베란다문을 열었다. 블라인드가 요란스럽게 착착 댔다. 냉장고를 뒤져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점검했다. 밀키드, 후르츠 통조림 먹다 남긴 것 한 통과 새것 한 통, 건강한 키위 두 개와 쭈글쭈글해진 것 반개, 오렌지 주스 반 병, 얼린 초콜릿, 맥주 한 병, 달걀 일곱 개... 그녀는 십 분쯤 후에 나타났다. 장미 한 다발을 들고.


"안녕."


내가 말했다.


"안녕."


그녀가 말했다.


"들어와. 자고 일어나서 제정신이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 세상에 자고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죽은 사람뿐이다.


"혼자 있어?"


"그런 것 같아."


그녀는 자신의 맨발을 보더니 가방을 뒤져 양말을 꺼냈다.


"상관없어."


"남의 집에 왔는데…."


그녀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뭘 마시겠냐고 묻자, 그녀는 커피를 달라고 했다. 뜨거운 걸로.

그녀는 내가 내놓은 뜨거운 커피와 쿠키를 먹으며 얼마 전에 봤다는 영화 얘길 했다. 

<사랑과 추억>


"몹시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바브라 스트라젠드가 주연도 하고 감독도 한 영화인데 하마터면 온통 다른 데 신경 쓰면서도 공부한다고 폼 잡다가 놓칠 뻔했다. 너도 봤으면 좋겠어."


나는 대답대신 고갤 끄덕였다. 해장술이랍시고 마신 맥주가 어제처럼 술술 넘어가지 않고 목구멍에서 한바탕 쇼를 한 뒤 위 속으로 쏟아졌다.


"공부가 안돼. 졸업이 다 돼가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녀는 베란다로 걸어가 도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내려놨다 했다. 


"너무 오랫동안 숨겨왔어요. 실컷 울어 버리세요. 눈물은 고통을 주지만 결국은 그것을 해소시켜주기도 하죠.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렇게 울어 버리세요. 그것들이 멀리 가게. 멀리로 멀리로 가 버릴 거예요. 멀리로 갈 거예요. … 그렇게 말해."


그녀의 옆모습- 우리는 베란다에 나란히 서 있었다.-이 사뭇 진지했다.


"어떻게 생각해?"


"뭘?"


"운다는 거 말이야."


그녀가 물었다. 나는 베란다로 쏟아지는 햇살 때문에 눈을 찡그렸다.


"울고 싶은 거야?"


내가 물었다.


"네가 있으니까 그러지 않아도 될 거 같아."


그녀가 말했다. 


"말도 안 되고 이해도 못 시킬 얘길 넌 들어주니까. 그래도 두 눈 반짝이고 들어주니까."


그녀가 말했다. 들어준다는 건 분명 힘든 일이다. 숙취가 가시지 않아 전두엽에 커다란 추를 달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도 들리는 대로가 아니라 들리지 않는 것도 들어야 하는 일이니까.

내가 파스타를 만드는 동안 그녀는 바흐의 프렐류드 LP를 찾아서 플레이어에 올려놓았다.


"페르디난트 아베르라는 사람을 위해 썼대."


그녀가 말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을까?"


 내가 말했다.


"왜?"


그녀가 물었다.


"언젠가는 실망시킬 테니까."


내가 말했다.


"실망시키지 않을 수는 없나?" 


그녀가 물었다.


"없어."


내가 말했다. 온 집안이 첼로의 분산화음으로 가득 찼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희원이었다.


"여보세요."


희원이 뭐라고 했지만 음악소리가 커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내가 다시 물었다.


"늦는다고! 무슨 음악소리가 그렇게 커?"


희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 뒤에서 댄스음악이 이곳 소리와 맞먹을 만큼 크게 들렸다.


"크게 틀어 놨으니까. 내일 봐."


내가 말했다.


"오늘 들어갈 거야."


희원이 말했다. 


"어쨌든 끊어."


전화를 끊고 오디오 볼륨을 줄이자 베란다 난간에 기대 서있던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동생?"


난 고갤 끄덕였다.


"새삼스럽긴."


"뭐가?"


"전화 왔길래, 일찍 온다는 줄 알았지 뭐야. 그런데 늦는대. 새삼스럽잖아."


그녀는 고갤 끄덕였다. 파스타를 먹은 뒤 그녀는 다시 커피를 마셨고 함께 전철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전철역 승강장 게이트에 다다랐을 무렵 그녀가 말했다. 

 

"떠나야겠어."


난 그녀를 봤다.


"어차피 사랑 같은 거 해봐도 시간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거야. 너도 알게 되겠지만…."


"어디로?" 


내가 물었다.


"안드로메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언제?"


내가 물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녀가 말했다.


"가면 찾을 있을까?" 


내가 물었다.


"어쩌면."


그녀가 답했다.


"내일 같은 것일 수도 있어. "


내가 말했다. 지하철이 곧 도착한다는 알림이 울렸다. 


"갈게." 


그녀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모습이 계단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곳에 계속 서 있었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늘 해오던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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