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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안메아 Oct 23. 2024

그녀는 집을 떠나고

15. Siempre Me Quedara.

"미안. 졸업식에 못 갈 것 같아."


나는 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졸업식에 못 간다고 말하고 깜짝 이벤트로 갑자기 나타나 축하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수가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걸 그녀의 학교에 도착해서 한 시간 넘게 헤맨 뒤에야 알게 되었다. 수가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찾으려고 추위에 벌벌 떨며 꽃다발을 들고 학교를 샅샅이 뒤져야 했다. 그녀가 졸업가운과 졸업장을 찾아가지 않았다는 걸 알고 난 뒤에야 상황을 파악하고 학교 앞 카페에 들어가 콧물을 훌쩍이며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추워. 어디야? 졸업식에 안 온 거야?'


문자를 보내고 십여분쯤 뒤 휴대폰 문자 알림이 울렸다.


'이리로 올래?' 


수였다.


수와 알게 된 후 그녀와 나는 서로를 위해 시간을 끊임없이 할애했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쪽이 서로의 학교로 가서 함께 책을 고르고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고 모든 것들에 대해 옹호하고 비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학비를 버느라 늘 전전긍긍하던 그녀가 마지막 학비를 납입하고 오는 길에 우리는 옛날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 맨 뒷줄에 앉아 <사랑과 추억>을 보며 큰소리로 울었다. 그때 흰 정인은 차 유지비를 벌기 위해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희원은 바이올린 전공이 무색하게도 클럽에서 유행하는 새로운 춤에 빠져있었고, 나는 용돈을 벌기 위해 초등학교 4학년에게 미적분을 이해시키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곳에선 정권교체를 부르짖었고, 체인을 겹겹이 두르고 스냅백을 쓴 전사들은 무대에서 비트에 맞춰 부모를 욕하거나 세상을 욕하고 있었다. 어쨌든 모두 다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버텨내고 있었다.


"네가 올 줄 알았으면 갔을 텐데."


수가 알려준 레스토랑에 도착한 나에게 수가 인사 다음으로 한 말. 그녀는 남자친구와 함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나만큼이나 추위에 벌벌 떤 꽃다발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고마워." 

                                      

새로 사귄 남자친구와 함께 있는 수는 행복해 보였다. 사실 레스토랑 입구에 도착했을 때 유리벽 안으로 보이는, 미소를 띤 채 한껏 행복해하는 수의 모습이 낯설어 그냥 갈까 망설였었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나를 발견하고 수에게 물어보지 않았다면 나는 그냥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수의 졸업축하 데이트의 방해꾼으로 등장해 버렸다.


"안녕하세요."


수의 남자친구가 소개도 없이 대뜸 인사했다.


"에, 예."


나는 가벼운 목례로 답했다.


"소개 안 해도 알지?"


수가 말했다. 그는 나를 아는 듯했지만 나는 그를 모른다.


"왜 안 들어오고 망설였어요?"


수의 그가 물었다. 


"그랬나?"


내가 대답했다. 수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듯,


"내가 말 안 했었나? 이쪽은 지우!"


"응. 말 안 했어."


내가 말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수에게서 연락이 점점 줄었고 연락을 해도 대답이 늦었고 통화를 하는 동안 딴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느꼈을 때부터.


"안교수님 딸이라면서요?" 


그가 물었다.


"네."


이후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무얼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수의 흐드러진 웃음이 어색했다는 사실밖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아무것도 읽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으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맞은편 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만 끊임없이 확인하고 있었다. 그녀의 그는 자신의 차로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약속이 있다고 둘러대고는 기어이 전철역 앞에서 그들과 헤어졌다. 그는 반짝이는 오렌지색 스포츠카에 수를 태우고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떠났다. 수가 원한다면 달도 사버릴 만큼 돈이 많은 것 같았다. 그 반짝이는 오렌지색 차를 탔다면 슬픈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그가 보고 싶었다.


"어서 오, 어, 안녕하세요?"


바텐더가 반가운 얼굴로 인사했다. 


"오늘도 약속?"


그가 물었다. 혼자 왔다고 말하려니 설명이 길어질 것 같아서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에는 주인으로 보이던 중년남자도 없었고 사라방드를 찾던 주정뱅이도 없었고 손님도 거의 없었다. 


"테킬라"


내가 말했다. 


"테킬라? 대낮에?"


그가 놀란 표정으로 웃으며 물었다.

  

"좀 있으면 해가 질 걸요."


내가 말했다. 


"테킬라 안 마셔봤죠?"


그가 물었다.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얼음이 든 잔에 테킬라와 자몽주스, 오렌지주스, 탄산수를 차례로 부어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렇게 마셔요. 이건 내가 살 게요."


그가 말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준 걸 얼른 마셔보라는 듯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으, 음악 좀 틀어주실 수 있어요?"


내가 말했다. 


"무슨 음악?"


"헨델의 사라방드"


내 대답에 그가 큰소리로 웃었다. 


"손님 그건 좀..." 


그의 대답에 나도 웃었다. 잠시 후 작은 공간이 스페인어로 가득 채워졌다.  


"Siempre Me Quedara."


그가 말했다. 


"무슨 뜻이에요?"


"나는 항상 네 곁에 머물 거야 뭐 그런 뜻."


"한번 더 말해줄 수 있어요?"


"씨엠쁘레 메 꿰다라."


그가 말했다.


"씨엠쁘레 메 꿰다라." 


그를 따라 내가 말했다. 


집에 들어가자 가방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누군지 알고 싶지도 누구든 받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가방째로 소파에 던져두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는데 샤워를 끝내고 나올 때까지 계속 울려대더니 내가 가방을 열려할 때쯤 잠잠해졌다. 수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삼십 분쯤 뒤 희원이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집으로 달려들어와서,


"야! 전화 왜 안 받아? 얼마나 많이 건 줄 알아?"


라고 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수가 아니었다. 

    

"그럼 네가 받지 그랬냐?"

 

난 짜증스럽게 되받고는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아니래."


희원이 말했다.


"그 사람이랑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는대."


"누구?"


"넌 나한테 관심도 없지?"


희원이 말했다.


"무슨 얘긴데? 말하기 싫음 관두든가."


나는 희원의 말을 듣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희원은 무언가 내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돈 많은 어떤 나이 많은 남자사람이 죽기 직전인데 엄마가 나더러 친아빠일지도 모른다고 유전자 검사를 받으랬거든."


"친아빠일지도 모른다고? 말이 왜 그래?"


내가 말했다.


"내 말이! 아무튼 그래서 유전자 검사를 했는데 불일치래."


희원이 말했다.


"돈 많은 친아빠가 물 건너 간 건데 왜 그렇게 신나?"


내가 물었다.


"돈 많은 쓰레기는 클럽에도 널렸거든. 아무튼 잘 됐어. 친아빠 후보가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중 한 명이 줄었잖아."


희원은 자신의 엄마가 실망한 것이 몹시 통쾌한 모양이었다. 희원이 그렇게 울었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괜찮아?"


내가 물었다.


"괜찮겠어 설마. 하지만 죽는 게 내 친아빠는 아니라잖아. 어딘가 살아있는 건데, 다행이지."


희원이 말했다.


"만나보고 싶어?"


내가 물었다. 희원은 잠시 생각했다.


"글쎄. 아닌 거 같아. 왜냐면 난 또 유전자 검사를 받으면서 기다려야 할 거거든. 기다리는 건 기대하는 거니까. 난 기대하고 싶지 않아. 곁에 있어준 적이 없는 사람을 아빠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희원이 말했다. 그가 알려준 노래 제목이 떠올랐다. Siempre Me Qued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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