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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안메아 Oct 23. 2024

그녀는 집을 떠나고

16. 그녀는 집을 떠나고

그의 이름은 규영이었다. 학교를 중퇴하고 스페인에 가기 위해 돈을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나와는 달리 사람을 좋아했고 매사에 의욕적이었으며 그래선지 찾는 이들이 많았다. 내가 그곳을 떠날 때면 '또 보자'는 인사를 잊지 않았고 나는 그 인사가 좋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어.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처럼."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언어들이 좋았다. 어떤 사람은 외모를, 어떤 사람은 성격을, 어떤 사람은 지식을, 어떤 사람은 상대가 가진 돈을 사랑하지만 나는 그의 언어들을 사랑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고 그는 자신의 모든 말을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나를 사랑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수와 그렇게 헤어지고 두어 달이 지난 후, 그녀로부터 장문의 편지가 도착했다.


"이번 주 목요일은 하루종일 가게에 있어야 해."


그가 절망적인 얼굴로 말했다.


"왜?"


내가 물었다.


"교대하는 녀석에게 그날 중요한 가족행사가 있대. 커피 줄까?"


그가 물었다. 난 고갤 끄덕였다.


"편지 왔어."


수의 편지를 흔들어 보였다.


"누구? 수라는 사람?"


그가 모카포트에 커피가루를 담으며 물었다.


"응."


"뭐라고 쓰여있는지 물어봐도 돼?"


"아니."


내가 답했다.


"궁금한데."


그가 웃으며 말했다.


"사랑은 사람마다 다를 거 같아.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하거나 느끼는 게 다른 사람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감정하고 일치하는지 확인할 수가 없잖아."


내가 말했다.


"음, 그렇지. 편차가 있을 수 있지."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사랑이 아닌 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거잖아. 커피맛을 다르게 느끼는 것처럼"


내가 말했다.


"이거, 슬픈 얘긴데."


그가 가까이로 다가와 내 눈을 빤히 보며 말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취업했대!"


순간 너무 큰소리로 말했다. 창피했다.


"어디?"


"회사"


"전공이 뭐랬지?"


"전자공학."


"재밌대?"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하고 있어. 전자기기 영업 같은 거."


"저런."


그가 말했다. 난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가 수납장에서 빨간 커피잔을 꺼내놓았다.


"처음 보는 거네."


"이건 니 거야. 다른 사람은 이 잔에 못 마셔. 이 빨간색이 내 심장이거든. 넌 내 심장에 커피를 담아서 마시는 거야."


그가 말했다. 커피가 끓었고 짙은 향을 내뿜었다. 그는 빨간 잔에 까만 커피를 담아서 나에게 주었다.


"심장이 뜨거우시네요."


"사랑하는 중이거든요."


그가 말했다.


"편지 읽어줄까?"


그의 언어에 마음이 녹아내린 나는 비밀을 털어놓는 스파이처럼 그녀의 편지를 열어 마음 내키는 부분을 골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 나는 지성을 개 팔아먹었다.  자부심을 똥 팔아먹었다. 지식보다 지혜보다 나은 것이 친절이란 말에, 내 업무적 능력에 혼신을 다하고 있다, 나는. 내가 세운 계획이며 결심들이 마침내 살아 남길. 너 또한 그러하길. 빨간 펜으로 잊지 않도록 써서 붙였다. 철두철미하도록. 내가 만든 내 성격이며 습관들을 이제는 지배해 끌려가지 않도록 정확하고 결단력 있는 내가 되자고. 나는 살아남아서 사람이 되고 싶다. …그 나머지는 온통 벌레 얘기들 뿐이야. 내가 싫어하는…."


"많이 힘든 모양이네."


그가 말했다.


"내가 먼저 전화했어."


"언제?"


"일주일 전인가 열흘 전인가. 그렇지 않고선 편지할 인간이 못 돼."


내가 말했다.


"잘했어."


"웃겨."


"뭐가?"


"벌레 얘기"


"벌레가 왜?"

 

"아침마다 전사자를 한데 모아 염을 하며 무덤으로 돌려보내는 게 일이래."


"벌레가 많나 봐?"


"추하고도 신 벌레"


"그렇게 싫어?"


"편지에 그렇게 적어놨어."


… ….           

                

나는 수에게 보낸 편지에 규영에 대해 썼다. 그를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잘된 일이야. 좋아하는 것에 머무를 수 있다면 기꺼이 환영해."


전화기로 들리는 수의 목소리에는 다소간 놀라움이 묻어있었지만 너무 지쳐있어서, 마치 생각 없이 휘두른 손에 모기가 잡힌 것 정도의 놀라움이었다.


"그래야만 할까?"


내가 물었다.


"스페인에 갈 거라며. 나중을 생각해."


수가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애를 해보시니 기분이 어떠신가요?"


수가 물었다.


"운동하다 뭉친 근육을 세게 주무를 때 같은 느낌이야."


내가 말했다.


"무슨 뜻이야?"


"아픈데 그 아픔의 뒤엔 묘한 성적 충동 같은 게 느껴져."


그녀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너무 정확한데? 그러고 보니 뭔가 형언하기 힘든 짜릿함 같은 게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느낌이 성적충동 인 건 확실하니? 너 마조히즘적인 데가 있는 것 같다."


… ….


"느낌이야 어찌 됐든, 사랑이란 게 즐겁기보다 비참한 시간이 더 긴 것만은 확실해. 순간의 기쁨, 영원한 슬픔…. 무슨 싸구려 영화 카피 같지 않니?"


그녀는 어느새 신나 있었다. 나는 그녀가 사디스트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헤어졌다고 말했었나?"


그녀가 말했다.


"누구? 그 오렌지색 차?"


내가 물었다.


"헤어졌어."


그녀가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죽었니?"


그녀가 물었다.


"미안. 살아있어. 살아야겠어."


내가 말했다.


"살아야겠어."


그녀는 내 말을 따라 했다.


"좋은 생각이야. 살아야겠어."


그녀가 다시 한번 말했다.


"순간의 기쁨, 영원한 슬픔"


전화를 끊고 수가 한 말을 다시 되뇌었다.




며칠뒤 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공항인데 올 수 있냐고. 나는 오후 수업을 팽개치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수는 몇 달 못 본 사이에 많이 여위고 해쓱해져 있었다. 수의 모습을 보자 슬픔이라고 표현하기에 부족한 많은 감정들이 일시에 쏟아져 들어왔다.  


"떠나."


그녀가 말했다. 말을 안 해도 그녀의 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떠나기로 한 것이다.


"어디로?"


그녀는 발권한 티켓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행복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녀가 말했다.


"가족들은 아직 몰라. 동의를 구하고 싶진 않았어. 그렇지 않음 일일이 설명해야 하고 설득해야 하니까. 이렇게 떠나버리고 나서 전화 한 통, 그리고 땡! 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거지."


그녀가 말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듣고만 있었다.

 

"도착하면 편지나 보낼까 했는데 공항에 도착하고 나니 니 얼굴은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연락했어. 괜찮지?"


"응."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야겠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그녀의 작은 여행가방이 내는 경쾌한 바퀴소리를 들으며 출국장 앞까지 따라 걸었다. 그녀는 출국장 앞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추고 나를 봤다.


"훌륭한 인연이었어."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녀는 내가 내민 손을 쳐다보더니 자신의 두 손으로 감쌌다.


"넌 기억할게."


그녀가 말했다.


"돌아갈 곳이 생겼네."


내가 말했다. 그녀가 웃었다. 내가 웃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는 일제히 웃어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눈물을 흘릴 만큼 웃었고, 그런 뒤에야 우리는 겨우 이별할 수 있었다. 그녀는 출국장 안으로 사라지면서도 줄곧 웃음을 참느라 입을 감싸 쥐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후면 북해 어느 바닷가에서 북극성 가까이에 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나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공항건물을 빠져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란 물감을 조금 풀어놓은 듯 아리한 하늘 위로 비행기 한 대가 느리게 나선을 그리며 날아오르고 있었다.  안드로메다를 향해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 현기증을 느꼈다. 누군가 저 하늘을 사랑해, 매일 창가에 서있었던, 그래서 결국 그곳으로 가버린 사람이 있지 않았나 생각했다. 바람이 불었다. 찬 대륙을 날아올라 사막을 지나고 바다를 건너 이곳까지 이른 바람이. 내 나이 스물넷의 봄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갈 곳이 필요해 집을 떠났어. 그녀도, 나도, … 우리 모두에겐 돌아갈 곳이 필요했거든. 그래서 우린 늘 그걸 생각해야 해. 너무 멀리 와 버리면, … 돌아가야 할 때가 와도 돌아갈 수 없으니까."


내가 말했다.


"그녀가 찾은 게 부디 인적 드문 곳에 자리한 맑은 호수이길 바라."


전화기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그는 잠들어 있었다.


"잘 자."


종료버튼을 눌렀다.      




나는 대학 1학년 , 생물학과에 다니던 선배로부터 물이 담긴 샤알레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내가 그걸  받았는지에 대해선 정확한 기억이 없으나 샤알레를 준 선배는 물 안에 개구리 알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고 나는 그것을 수조에 옮겨 담고 개구리가 나오기만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그것에서 올챙이가 움직이는    있었고  사실을 샤알레를 건네준 선배에게 자랑하며 말했다. 그러자 그는 말도 안 된다며 장난 삼아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물을 개구리알이 들어있다고 속인 거라고 했다. 거기엔 정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다면  수조 속의 그것들은 뭐란 말인가? 나는 그 일 이후로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리고 한 달  내가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을 , 그것들은 썩는 냄새를 풍기며 수면 위로 둥둥 떠올라 죽어있었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지만 나는 개구리 알을 받은 것이다.

                        

                                                                                        최지서, <어둠의  저편으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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