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같은 책. 옳은 얘기를 풍부한 사례로 뒷받침 하지만...
"When they go low, we go high." 지난 미국 대선에서 미셀 오바마는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며 말했다. 이후 이 말은 자주 회자됐다. 손석희는 앵커 브리핑에서 저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겪은 한국 사회에서 '품격'은 하나의 위로였다. "쟤네는 저렇게까지 하는데 당하고만 있으면 등 x이지"라는 말에 동의하지 못했던 이유는 저런 문장 덕분이었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스티븐 레비츠키, 어크로스, 2018)를 한 문장으로 줄인다면 이 말이 아닐까. "트럼프 무리들이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격 있게 갑시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교과서 같은 책이다. 교수가 써서 그런가. 많은 사례를 바탕으로 옳은 얘기를 전한다. 저자들은 전제주의 행동을 가리키는 네 가지 신호를 꼽는다. 1) 민주주의 규범에 대한 거부, 2) 정치 경쟁자에 대한 부정, 3) 폭력에 대한 조장이나 묵인, 4) 언론 및 정치 경쟁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성향. 여기서 한 가지에만 해당해도 민주주의에 위험한 인물로 저자들은 평가하는데, 트럼프는 네 가지 모두에 속한다고 말한다. 물론 트럼프가 유일한 위험인물은 아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남미 국가의 민주주의가 무너진 경로를 분석한다. 어떤 경우에 기어이 민주주의가 망가지고 말았는지, 또 어떤 경우에는 민주주의가 버텨낼 수 있었는지 밝힌다.
저자들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두 가지 규범이 중요하다고 한다.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이다. 상호관용이란 한마디로 정치인들이 서로를 적이 아닌 경쟁자로 여기는 것이다. "한 진영이 경쟁자를 위협적 존재로 바라볼 때 선거에서 그들에게 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전제적 방안까지 고려할 것이다." 제도적 자제란 성문화 되지 않은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법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다른 정치인들과 타협해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국회가 대통령탄핵소추의결권을 가졌다고 무분별하게 남발해서는 안 되고 최대한 정치적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무기 삼아 전제주의적 인물이 민주주의를 망가뜨리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교과서의 단점이랄까. 다소 뻔하다. 풍부한 사례, 부정할 수 없는 내용을 담았지만 진짜 궁금한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과거 안희정이 이런 발언을 했었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도 나름대로 선의를 가지고 국정운영을 했다고 본다." 당시 여론의 질타는 매서웠다. 욕을 한 바가지 먹고, 안희정은 발언을 정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 말은 틀린 말일까. 저 발언은 정치에서 상호관용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정치에 더 이상 협치는 없을 것이다. 서로 경쟁자가 아니라 적으로 보면서 손을 잡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명박, 박근혜에게도 상호관용을 발휘해야 할까. 그들의 불의가 이렇게 밝혀지고 있는데도? 그들과 부역한 정치인들은? 이 책을 읽고도 여기에 대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미셀 오바마는 자서전 <Becoming>을 내면서 트럼프에게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며 화냈다. 트럼프 이후 독일, 프랑스, 영국, 브라질 등 세계적으로 극우 정치인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 한국에도 민주주의의 선을 밣고 다니는 정치인들이 보인다. 그들은 저열하게 가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품격 있게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