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으로 요리하고 철학적으로 먹기 - 혜산 스님 2편
“일반 사회에선 현실적인 여건과 좁은 환경 안에서 많은 것들을 바라보고 해석할 수밖에 없죠. 음식도 마찬가지예요. 반면 수행자들은 일반인들과 달리 벽이 없으니 그 외에 것들을 내다볼 수 있어요. 고요한 수행 속에서 일반인들은 시험하지 못한 것들을 불시에 체험하기도 하니까요.”
옛날의 수행자들은 산속에서 먹을거리가 궁핍해진 상황에서도 끝없이 정진해야 하는 고행에 놓여있었다. 그들에게 음식은 수행을 위한 것이었고, 수행을 위해선 또한 건강한 육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음식 하나라도 그것이 정신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육체적으로 어떤 반응이 오는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불가에서 말하는 오신채를 먹지 마라, 고기를 먹지 마라, 살생을 하지 마라 등의 계율은 종교적인 박애정신이나 계율적인 가르침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불가에서 육식을 금한 것은 일반적인 채식주의와는 차이가 있어요. 불가에서는 육식과 더불어 오신채를 금하는데, 그러한 계율은 스님들이 먹어보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반응과 수행에 있어 해로운 현상들을 체험했기 때문에 금지된 이유가 커요. 오신채만 해도 그런 음식을 먹으면 악취가 심하고 발음發音이 일어나는 등 몸에 이상 현상이 찾아오죠. 그런 내용들이 경經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요.”
불가의 계율은 부처님 시대부터 체험에 의해 고증된 것들이다. 그렇게 전승된 것 중에는 ‘일중식一中食’이나 ‘오후불식午後不食’이 대표적이다.
‘일중식’이란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 오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오후불식’과 더불어 일중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불가의 전통이기도 하다. 일중식은 점시 공양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여기에도 심오하고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사람의 기운을 24시간으로 나누어볼 때 우주의 질서는 일반 사람들이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하게 작용한다고 해요.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자정을 넘어서면 기운이 서서히 일어나 정오에 가장 왕성해면서 최고 정점에 달한다고 하죠. 그래서 불가에서는 정오를 넘으면 음식을 먹지 말라는 계율이 있어요. 정오가 넘으면 기운이 점점 약해지는데, 그때 음식을 먹으면 소화력도 떨어지고 수행에 이로울 것이 없다는 거죠. 그래서 ‘오후불식’의 전통이 유래한 거예요.”
하지만 불가에서는 법의 절대성만 강조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일중식이 힘들 때는 아침공양으로 약간의 죽을 먹어도 괜찮다고 경에 설명되어 있다. 또 환자의 경우에는 오후에도 음식을 먹을 수 있는데, 이때는 ‘공양’의 개념이 아니라 ‘약으로 먹는 식사’라 하여 ‘약석藥夕'이라고 한단다.
부처님의 법은 음식뿐 아니라 생활 전체와 우주의 질서까지 설명한다. 단지 우리가 그 원리를 간파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할 뿐이다. 인간이 기본으로 삼는 식문화 하나만 해도 체험을 통해 철저히 검증된 부처의 사상과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음식의 원리를 가만히 살펴보면 만물의 근본 이치가 다 들어 있어요. 영물들의 ‘귀소본능’만 해도 인간의 음식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죠. 제가 나이가 들어보니 인간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노령이 되어 수명이 다해갈 땐 입맛도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걸 알겠더군요. 성장하면서 우리는 다양한 음식들을 접하고 좋아하지만, 결국 돌아갈 때는 유년기에 섭생한 것들을 그리워하게 마련이죠.”
그것은 유년기에 먹은 것을 비롯해 자주 경험한 음식들이 우리의 인식세계에 가장 깊이 각인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식은 나이가 들수록 나선형처럼 점점 넓어지다가, 노쇠해지면 다시 역순으로 돌아와 결국엔 본능만 남는 구조를 취한다. 노령이 되면 식성 또한 처음으로 돌아가려는 ‘회귀현상’을 보인다. 그러니 인간이란 한 가지의 본능을 초월하기도 얼마나 어려운 존재인가.
“젊을 때는 식욕과 소화력, 호기심이 왕성하다 보니 여러 음식을 즐기기 마련이죠.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결국엔 태생지의 음식을 찾게 되더군요. 저는 바닷가 마을이 고향인데, 나이 먹을수록 감태나 뜸부기(갈조류 모자반과 해초의 일종) 같은 고향 음식이 문득문득 그리워질 때가 많아요. 산간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도반들의 경우엔 산나물이나 산초를 그리 좋아하더라고요. 결국 태생이 산인 사람은 산의 음식을, 바닷가인 사람은 바다의 음식을 그리워하죠.”
회귀본능의 일례로 대중음식점들의 패턴을 들 수
있다. 한땐 보리밥집이나 두부점 등 향수를 자극하는 메뉴를 취급하는 전문식당들이 성업을 이루지 않았나. 그러나 지금의 아이들이 성장한 몇십 년 후에는 그런 음식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햄버거집이나 피자집이 그 자리를 대신할지 모른다. 그들에겐 햄버거나 피자가 향수 어린 음식이 될 테니 말이다.
“불가와 속가의 식생활은 결국 한 뿌리예요. 절의 음식들이나 문화는 오래전부터 속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으니까요. 최근 들어 차茶 문화가 발달되고 있는데, 그 또한 절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죠. 불가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일반화된 문화니까요.”
그것은 비단 음식만은 아니다. 절이란 예로부터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 ‘쉼터’와도 같은 곳이었다. 일상에 지친 사람들은 절에 와서 쉬어 가고, 영감을 구하는 예술인들도 절에 와서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지친 몸과 마음을 다스려 제자리로 돌아가서는 다시 살아내고 다시 붓을 잡았다. 그렇게 절은 심신心身이 쉬어 쉬어가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