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벼락치기 통역

by 구하늘

그 뒤로 메일함을 수시로 확인했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다. 48시간 뒤 출국인데... 도대체 자료는 언제 주는 걸까? 이러다 개망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신종 피싱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에 마음이 바싹 타들어갔다. 그러던 중, 드디어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통역 자료를 받은 건 4월 17일, 출국은 다음 날 4월 18일이었다. 부리나케 자료를 살펴보았다. 일상에서 쓰이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주제는 "드라이 에칭 기술 및 장비 소개"였다. 아무리 이과라고 해도 드라이 에칭은 나도 처음 듣는다. 자료 속 단어와 표현을 모두 찾아가며 한국어로 적어두고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었다. 챔버, 기판, 플라즈마... 후회할 틈도 없이 새벽까지 통역 준비를 했다.




다음 날.

인천공항에서 회사 분들과 첫 인사를 나눴다. 대학생이 올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안녕하세요! 일어 잘하신다고 들었어요. 일어 전공이세요?"


"안녕하세요! 아니요, 저는 컴공 다니고있어요!
공부하다 보니까 이런 기회가 생겼네요ㅎㅎ.."


"그런데 후쿠오카는 가보셨어요?"


"아니요! 이번이 처음이에요!!"


하하호호 웃고 있었지만, 순간 팀장님의 눈빛에서 '얘, 믿어도 되나...?'라는 의구심이 비춰졌다.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하자 숙소까지 가는 방법이 적힌 인쇄물을 건네받았다.


목적지는 쿠로사키.

후쿠오카도 처음이었고 쿠로사키는 들어본 적조차 없는 곳이었다. 모르는 길은 역무원에게 물어가며 인원 수대로 승차권을 구입하고 쿠로사키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나를 바라보는 팀장님의 눈빛이 점점 불안에서 믿음으로 변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날부터 약 2주간의 연수가 시작된다. 출퇴근은 일본 직원분이 매일 차로 데려다주어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중심지에서 조금만 이동하면 찻길 옆으로 논밭이 펼쳐졌다.

‘이런 시골에 회사가 있다고…?’




도착해보니 일반 사무실이 아닌 반도체 생산 라인이었다.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방진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사복이나 머리카락에 붙은 아주 작은 먼지도 반도체 설비에는 큰 영향을 줄 수 있어 예외는 없었다. 사람들의 눈만 보였다. 직접 공정 라인을 둘러보고 기계를 다루면서 수업처럼 설명이 진행되었다. 처음 맡는 통역이라 안그래도 긴장하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마스크와 기계 소음 때문에 목소리가 자주 웅얼웅얼 뭉개졌다. 다행히 사전에 전달받은 자료를 어느 정도 숙지해 간 덕분에 겨우 의미 전달은 할 수 있었다.


첫날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유독 틀린 문제만 뇌리에 각인되듯이 실수했던 부분만 계속 떠올랐다. 자괴감에 빠지는 것도 잠시, 오늘 놓쳤던 단어와 표현을 찾아보며 다음 날을 대비했다.


아무리 준비하고 조사해도 매일 새로운 단어가 쏟아졌다. 퇴근 후에는 항상 통역 자료 외에도 반도체 관련 일본 포스트나 기사를 읽으며 다음 날을 준비했다. 수능 공부도 이렇게 열심히 안했는데...


어느새, 기대 20% 걱정 80%였던 연수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통역해주신 덕분에 공부도 많이 되고 편하게 지냈습니다.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이 이렇게 가슴에 푹 와닿을 줄은 몰랐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놓였다.


"처음이라 부족한 게 많았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눈앞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조금 감성에 빠지려는 순간, 다시 한마디가 가슴에 푹 들어왔다.


"군대 잘 다녀오구요~~~"


아...

나 군대 가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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