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자료는 우선 한국어로 초안을 작성한 뒤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했다. 첫 장은 함께 고생한 팀원들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시작해 점점 기술적인 주제로 넘어갔다. IT 용어는 대부분 영어라 세계 공통일터... 번역이 쉽게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복병이었다. 문제는 영어 발음 차이였다. 예를 들어 "Cache Data"의 '캐시'는 일본에선 '캿슈(キャッシュ)'라고 발음한다. 아무리 '캐시'라고 말해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흔히 '운영체제'라고 부르는 OS(Operating System)는 일본에서는 '기본 소프트웨어(基本ソフトウェア)'라고 한다. '제어판'도 '컨트롤 패널(コントロールパネル)'이라 부르는데, 이처럼 사소하지만 전혀 다른 표현들이 많아 예상보다 번역 작업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컨퍼런스 전날 일본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했다. 단순히 먹고 놀러 가는게 아니라, 무언가 '할 일'을 안고 일본을 간다는 게 색다르게 느껴졌다.
드디어 컨퍼런스 당일.
메일로만 연락하던 운영진과 직접 인사를 나누고, PC 세팅과 마이크 테스트, 발표 리허설까지 순서대로 진행됐다. 시간이 다가오자 텅 비어 있던 객석도 하나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모국어가 아니다 보니 발표 중간에 말문이 막히면 어쩌나 걱정이 컸다. 혹시나 해서 헷갈릴 만한 표현은 컨닝페이퍼마냥 노트북 앞에 붙어두었지만 막상 발표 중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1시간가량의 발표가 아무런 사고 없이 끝나자, 운영진들도 한숨 돌린 듯 서로 안도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발표 후엔 객석에서 따로 다가와 연구 내용에 대해 질문을 건네는 분도 있었다. 컨퍼런스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시간 괜찮으면 뒷풀이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일본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바쁠 일이 뭐가 있겠나. "아리가또고자이마스" 하고 따라나섰다.
뒷풀이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외국인이 일본어로 발표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 운영진도 내심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일본인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않아서, 영어로 했더라면 내용 전달이 어렵고 청중 수도 줄어들까 봐 오히려 그 점을 더 우려했다고 한다. 컨퍼런스가 끝난 후에는 운영진 측에서 트위터(X) 같은 SNS를 통해 반응을 살폈는데, 올해는 우리 팀의 연구 주제에 흥미를 보인 사람이 많았고,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여기에 간단한 기사로 소개해도 되겠냐는 요청이 들어와 흔쾌히 수락했다. 그 뒤로도 이자카야에서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늦은 밤까지 시간을 보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달쯤 뒤, 운영진이 기사 링크를 공유해주었다. 일본 기사에 내 이름이 실리다니 묘한 기분이었다. 이후, 연구 성과를 좋게 봐준 한국의 한 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덕분에 자연스럽게 새로운 곳으로 이직까지 하게되었다.
이제 일어는 다시 묻어두고, 본업으로 돌아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