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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대로 Jul 30. 2024

여름의 약속, 남덕유의 솔나리

​  여름 산에서 비를 피하기는 어렵다. 산길에서 처음 맞는 비는 시원하지만 계속 맞다 보면 춥다. 또 장마철에는 젖은 배낭, 신발, 카메라 가방 말리기도 힘겹다. 그래서 오르내리며 반드시 비를 맞게 되는 지리산이 아니라면 비는 피하고 싶다. 6~7월은 주말마다 비가 오락가락했다. 여름에 반드시 만나고 싶은 꽃이 있다. 내가 만난 산꽃 이야기를 쓴다면 쓰고자 손꼽았던 꽃이다.  7월부터는 이 꽃을 만나고 싶다. 이 꽃을 만나려 밤에 카메라 충전기를 충전했지만, 아침에 비가 와서 지난주엔 포기했었다. 이번 주를 놓치면 8월이 된다. 8월이면 늦다.

  큰 돌무더기로 올라 뒤돌아 밑을 보며 여유 있게 도시락을 먹었던 기억 속의 산길은 분명 덕유학생교육원길이었는데 이젠 찾을 수 없다. 덕유산국립공원 탐방지원센터에서도 영각사나 육십령으로 오르라고 안내한다. 여름 산행은 계곡이 좋은 산길로 발길을 옮긴다. 영각재까지 계곡이 이어진 영각사로 방향을 잡아, 계곡을 느끼며 쉬엄쉬엄 걷는다. 가지산에도 있다는 이 꽃은 무단 채취로 멸종 위기종이 되기도 했다. 덕유산은 오르는 산길에서는 산꽃을 만나기 어렵지만, 능선에 오르면 못 만난 꽃들을 맘껏 만날 수 있다. 여름꽃은 덕유산이 최고다. 원추리 군락지부터 주홍빛의 동글동글한 동자꽃 무리들도 흔하게 만난다. 그러나 이 꽃은 남덕유산을 지나 서봉 주변에만 있다. 큰 카메라를 짊어진 산벗끼리는 이 꽃을 봤냐고 서로 물으면서 지나친다. 오늘은 유달리 산벗들이 없다. 못 볼까 염려하는 조급증을 다독이며 나무가 하늘을 만나는 지점까지 계속되는 된비알을 견딘다.

  남덕유산은 바위 맛집이다. 정상까지 바위에 걸쳐놓은 계단을 오르며 하늘과 능선을 조망하며 오른 산을 느낀다. 이제 서봉을 향하며 눈을 부릅뜨고 찾는다. 전성기를 지나 지고 있는 한 송이를 발견했다. 그래도 만나서 다행이다. 한 송이를 봤으니 더 많이 보일 것이다. 또 한 송이를 보고 나니 욕심은 더 일어난다. 한 줄기에 여섯 송이가 왕관처럼 펼쳐져 바람에 흔들리며 새소리와 어울려 눈과 귀가 함께 열리던 모습이 보고 싶다. 이것은 욕심이지만 그 욕심을 감추기는 어렵다. 서봉에 가까워질수록 더 많다. 이 꽃의 잎은 소나무 잎같이 생겼고, 꽃은 여섯 꽃잎이 뒤로 돌돌 말려 수술의 주홍 꽃밥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솔나리’이다. 크기도 색도 남다르다. 분홍빛과 보랏빛이 섞여 눈을 사로잡고, 주홍 꽃밥이 선명하게 여섯 점을 찍는다.

  너무 더워서 복숭아로 허기를 달래고 다시 걷는다. 두 달을 쉰 발걸음이 수월할 리 없다. 더구나 무더위로 땀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흐른다. 계곡에 발 담그고 가만히 머무르면 시원한 숲길의 바람도 계속 걷고 움직이니 역부족이다. 그래도 이 모진 더위와 갈증도 견뎌지는 이유는 무얼까? 이 꽃을 만난다고 눈에 보이는 내 삶의 변화는 당장 없다. 그러나 이 꽃을 본 순간 충분히 보상을 받는다. 만나고 싶어 3~4시간 올라 5분 10분 만나고 다시 3~4시간 내려와도 꽉 찬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은 귀하다.

  삶이 산행과 같다면 미리 갔다 올 수 있지만, 매번 가보지 못한 산을 오르는 삶은 항상 초행길이다. 그래서 앞장선 지도자를 따르던 편한 발걸음이 내가 앞장서게 되면 주춤거리게 된다. 함께 목적지에 도착하면 다들 좋아할 것이고, 의미 있는 것은 분명하다. 시작과 끝만 있다면 쉽겠지만, 중간은 예상보다 길고 괴롭다. 그 목적지까지 이르는 길을 버티는 것이 실력이다. 즐거울 때 나누는 웃음은 축복이지만, 힘겨울 때 듣는 짜증과 괴로운 표정은 고통을 증폭시킨다. 내가 느끼는 힘겨움 보다 내 모습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어려움은 숨어서 혼자 견디고 싶다. 어려움을 드러낼 수 없어, 나는 앞장설 수 없었다. 이루기 편한 목표는 없기에 의미 있는 실천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여야 힘을 발휘하고 지치지 않고 계속하여 이룰 수 있다. 솔나리의 꽃잎은 뒤로 말려 수술과 암술을 더 솔직하게 보여준다. 이 모습을 보며 어려움과 부족함을 숨기거나 피하려고만 했던 내 젊은 시절이 떠오른다. 나만의 소중한 주홍빛 여섯 개의 꽃밥은 무엇일까? 아직도 손에 잡히지 않지만 허무해하지는 말자. 성장을 위해 움직였던 모든 내 노동은 모두 배움을 향해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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