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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대로 Jun 04. 2024

계룡산의 노루발풀꽃

- 마음을 나누지 못한 벗을 기억 하며


 잊고 지내다 문득 네가 떠올랐다. 남아 있는 연락처는 016으로 시작하는 연락이 안 되는 번호였다. 마지막 연락이 30년 전이었다. 현실의 무게에 허덕이는 나에게 손 내밀어 연락했던 것은 항상 너였지. 현실적 걱정보다 내 감정을 지키고 싶었다. 이런 나를 친구들은 걱정했었지. 그 걱정에 나답게 살고 싶다고 웅얼거리며 대답했었지. 자신감은 사실 나도 없었으니까. 나라고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남편과의 결혼이 마냥 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 졸업을 앞둔 6명의 청춘들이 계룡산 남매탑으로 갔던 40년 전의 산행은 대중교통으로 편하게 갈 수 있는 이름난 산이라 선택한 것인지, 당시 교과서에 실려있던 ‘갑사로 가는 길’이라는 글 때문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동학사 입구에서 자고, 다음 날 남매탑까지만 오르는데도 힘겹게 올랐던 기억이 난다. 지금 떠올려보면 갈 곳 없이, 학창 시절이 끝난다는 당혹감 때문인 듯하다.


 가깝지만 낮은 높이와 도심형 국립공원이라 자주 찾지 않았던 계룡산을 오랜만에 찾았다. 만날 수도 연락할 수도 없지만, 네가 그리웠다. 우정이 사랑보다 더 소중하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부모 팔아 친구 산다는 말이 있듯이. 벗과의 약속이 가족보다 우선이었다. 그런 벗이 나에겐 너였다. 그랬던 너와 연락이 끊긴 채 30년이 지났다. 애인은 없어도 친구는 있다고 자신하던 우리였는데 말이다.


“남편 상황을 부모님도 아셔?”

결혼 전날 남편 친구와 네가 만나는 자리에서 너는 나에게만 들리는 말을 건넸다.

“지금 그 말을 왜 해? 뭘 원해?”

나 또한 화가 나서 쏘아붙인 채 그날 일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곳도 네 집이었네. 딸 둘을 데리고 미술 학원을 운영하던 넌, 시댁 식구까지 챙기느라 바빴지. 난 주말부부로 혼자 딸을 키우며 직장 다니느라 틈이 없었고. 그러고는 나에게 친구가 있는지도 잊고 살았네. 사는 곳도 옮기고 적응하느라 더욱더. 그러다 동기들을 다시 만나니, 너와 가장 가까웠던 나에게 너를 묻더군. 그제야 알았다. 네가 좋아한 사람이 누구였고, 그 사람에게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결혼했던 일을. 우리는 친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네. 모든 것을 다 말하며 나눌 수 있는 벗과 함께 20대의 청춘도 함께 잃어버린 것을 그때야 알았네. 50대에 네가 새삼 그리운 것은 그 청춘을 되돌리려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며 나누고 싶은 바람이라네. 이제 네 딸들도 우리 딸도 다 컸으려니 하니 더 그립네.


 갑사에서 금잔디고개를 지나 삼불봉 고개에서 가파른 돌계단을 보며, 남매탑을 보러 갈까 잠시 망설였다. 그래도 추억이 떠올라, 갔다가 되돌아와 점심을 먹기로 했다. 5층 석탑과 7층 석탑 중 어떤 탑을 중심에 놓고 사진을 찍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랐다. 기대하지 않았던 갑사 계곡길에서 ‘노루발 풀꽃’을 만났기에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 덕인지 가파른 돌계단을 되돌아 오르는 선택도 흐뭇하게 했다. 두 석탑 중에 낮고 여린 탑을 중심으로 찍으면 두 탑이 더 조화로워 보였다.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든 요즘은 산꽃도 숨 고르기를 하는 시기이다. 산수국이 몽글몽글 꽃망울을 틔울 준비를 하고, 비비추도 꽃대를 튼튼하게 밀어 올리는 중이다. 높은 산에 비교적 자주 보이는 꽃이 노루발풀꽃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소백산, 방태산에서 두 번 정도밖에 못 본 꽃이라 반가웠다. 눈 덮인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풀잎이 노루발자국 같다는 이 풀꽃은 계곡길에서 산길이 시작되는 길가에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피어있었다.


  20 ~ 30cm의 긴 꽃대에 7개의 꽃이 어긋나게 일렬로 피었다. 끝이 다섯 갈래로 갈라진 꽃이 손잡이처럼 휘어진 한 개의 암술 주변을 노란 수술과 함께 감싸고 있다. 서로 어긋나서 만나지 못하는 내 벗과 나처럼 꽃들은 고개를 땅 쪽으로 숙였지만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나 꽃 하나하나가 열매 맺는 가을이 되면, 그 열매가 떨어질 때는 서로 만날 수 있겠지. 어디에 어떻게 지내더라도 스무 살 무렵의 따스하고 넓은 마음을 지키면서 지내기를 바라는 내 마음의 돌탑을 쌓으며, 연천봉을 돌아 다시 갑사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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