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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옥 Mar 27. 2024

교수가 청소부라니

강하고 특이한 강남 엄마

“너 정말 대단하다, 교수가 호텔에서 청소를 하다니...”

"엄마, 교수는 타이틀일 뿐이야. 교수이기 전에 사람이고, 사람이 하는 일을 못할 게 뭐 있어?"


호텔까지 쫓아간 엄마

여름에 부모님이 한 달간 미국에서 지내게 되었다. 아빠 칠순도 못 챙겨드려서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던 참에 손녀들 보고 싶어 하는 부모님께 미국행 비행기를 태워드리자는 남편의 배려였다.


늘 그렇듯이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마자 호텔은 성수기에 들어섰다. 일손이 모자라서 매니저까지 동원되어 객실 청소에 나섰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전화받고 튀어가 도와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원래 풀타임은 주 5일, 파트 파임은 주 2일을 일해야 한다. 일주일에 하루만 일하게 해주는 배려도 감지덕지인 마당에 부모님 계시는 한 달간 휴가를 내기가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다.

고민을 하던 사이 주말이 와버렸다. 손주들하고 집에 계실 동안 먹을 것을 챙겨놓고 아르바이트를 다녀오기로 했다. 안절부절못하던 엄마는 급기야 신발을 신고 나를 따라나섰다.


“엄마, 청소도 직업인데 다 큰 딸 직장에 엄마가 따라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가서 살짝 보기만 할게. 손님인 척하고 걸어 다니면 되지.”

“매니저가 뭐라고 하면 엄마 로비에 얌전히 앉아있어야 한다, 알았지?”


결국 슈퍼바이저에게 양해를 구하고 엄마는 호텔 청소 일일 체험을 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만실로 청소할 사람이 부족한 마당에 엄마는 나를 쫄쫄 따라다니며 조수역할을 곧잘 했다. 침대시트를 벗기고 베개커버를 갈아 끼우는 일을 도맡아 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안 쓰던 근육을 사용하여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어깻죽지와 팔뚝이 금세 힘들어진다. 엄마는 끙끙거리며 도와주다가 힘에 벅차면 연거푸 “너 정말 대단하다, 교수가…”라며 끝말을 흐렸다.


그래도 1년은 해보라며

처음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 그래도 일 년은 해봤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니 기왕이면 366일은 해보라던 엄마였다. 직접 따라나서서 일을 해보니 여간 힘든 게 아니라며 걱정스레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 혼자 애들 키우는 것도 힘든데 주말에 꼭 일을 해야겠니? 얼마 번다고 이러냐… 너 버는 것만큼 엄마가 지원해 주면 그만둘래? 주말에 그냥 편하게 놀고먹고 좀 쉬면 안 되냐?”


같은 대답을 계속해드렸다. 청소를 하면서 얻는 정신적 치유, 돈보다 더 귀한 경험을 얼마나 즐기고 있는지를. 뒤돌아서면 잠시 후 같은 질문을 또 한다. 처음 듣는 것 마냥 같은 대답을 또 해준다.


듣기 좋은 부부싸움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까지 같은 질문과 같은 대답이 반복적으로 오갔다. 듣다 못한 아빠가 나섰다.


아빠: “그만 좀 하세요. 우리가 말린다고 안 할 아이가 아니잖소.”

엄마: “딸이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하는데 말릴 생각도 안 해요?”

아빠: “당신이 그렇게 키운 거 기억 안 나요?”

엄마: “내가 뭘요?"

아빠: "애들 어렸을 때부터 일을 시켰잖소. 건물청소도 기억한다고요."

엄마: "그때는 교육상 시킨 거지!”


나 때문에 티격태격이 시작되었는데 나는 어째 이 대화가 흥미진진했다. 그만 싸우라고 말리면서도 두 분이 이렇게 열을 올리고 다투는 듯한 대화가 듣기 좋다.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연로하여 싸울 힘도 없어지면 이런 격한 대화가 그리울 것 같다.


강남에서 건물청소를 시킨 획기적인 엄마

아빠가 엄마보고 우리를 그렇게 키웠다고 하는 데는 일리가 있다. 엄마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일을 하고 용돈을 벌게 시켰다. 아주 어렸을 때는 집안일을 하거나 아빠 구두 닦기, 어깨 안마 등으로 동전을 모으게 시켰다.

조금 커서는 오빠는 숙식을 해야 하는 무주 리조트 스키장으로 보내고 동생은 신문배달을 시켰다. 무주 리조트로 보내진 오빠는 미련할 정도로 착하기도 하고 돌아올 길이 없어 끝까지 임무를 잘 마치고 돌아왔다. 새벽잠이 많은 동생은 얼마 못 가 신문배달을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처음으로 하게 된 아르바이트는 동네 5층짜리 건물청소였다. 처음에는 엄마가 새벽에 세 자식들을 깨워서 데리고 갔었다. 첫 월급을 똑같이 나누어서 받았던 기억이 난다. 결국 새벽잠이 많은 두 아들은 중도하차하고 나는 학교 가기 전에 청소를 하고 집에 와서 샤워하고 교복을 갈아입고 등교를 하곤 했었다.

꼭대기층부터 아래층까지 청소를 하고 마지막으로 입구 유리문을 닦고 마무리 짓는 순서로 진행했었다. 청소를 조금 늦게 시작한 날 일층 입구 유리문을 닦다가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고개를 돌렸다. 그만두자니 고민이 되었다. 일단 용돈이 줄어들 것이고, 엄마가 동네 친구 건물주에게 어렵게 부탁해서 따낸 일자리인데 아무래도 책임감에 큰 타격이 올 것 같았다. 그 뒤로 나는 더 일찍 일어나서 등교시간과 겹치지 않게 일찍 청소를 마치기 시작했다.


사는 곳만 8 학군

새벽부터 깨워서 영양식 먹여가며 공부를 시키던 흔한 강남 학부보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다르다 못해 특이하기까지 해서 동네 또래 학부모들이 한 번씩 와서 잔소리를 해대곤 했었다. 뭘 먹여야 한다, 학원이라도 보내야 한다, 과외 선생을 소개해주겠다 등의 부채질을 한바탕씩 하고 가는 것이다. 보통 과외선생이 집에 오면 집이 조용해야 한다며 우리 집에 와서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며 시간을 때우는 아주머니들이었다.


고맙게도 엄마는 흔들리지 않았고 덕분에 사교육에 끌려다니는 고통은 면할 수 있었다. 교육에 전혀 투자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국영수과에 목숨 거는 학부모들과는 달리 악기, 운동, 서예, 미술 등 다양한 레슨을 받기는 했다. 획기적인 엄마의 교육방식 덕분에 우리 셋은 강남 8 학군이라는 곳에서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청소년기를 보냈다. 사는 곳만 강남 8 학군이지 수험생 치고는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방치형 교육이 좋다가도 솔직히 극성스럽게 챙기는 엄마를 원망하던 친구들이 가끔 부러울 때가 있었다.


이렇게 키워줘서 고마워

조금 더 자라서 엄마와 나누었던 대화 중에 그때 나를 강하게 키워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엄마의 특이한 교육철학 덕분에 책임감과 자립심도 기르고 경제관념을 키울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묵묵히 엄마의 뜻이라면 무조건 지지해 온 아빠 역시 같은 인사를 받았다.


“교수가 청소를 한다니…” 남들이 이렇게 말해도 아빠는 묵언과 기도로 지지해 준다. 그만두면 안 되냐고 되묻는 엄마도 늘 “대단한 우리 딸”로 마무리를 짓는다.


어렸을 때부터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남 앞에 서기를 죽기보다 싫어했다. 워낙 몸이 허약했고 신경이 예민하여 어렵고 힘든 일은 시도하기도 힘들어했다. 그러던 내가 어느새 강단에 서 있는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남편 없이도 미국 땅에서 건강하고 씩씩하게 애들 키워가며 살고 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보이지 않는 부모의 남다른 교육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의 엄마던 청소부의 엄마던 우리 엄마는 참 대단하다. 그런 엄마의 뜻에 무조건 따라주는 아빠는 더 대단하다. 때로는 무관심한 듯, 때로는 너무 강하게 키우는 것 같아 서운할 때도 있지만 그런 대단한 부모님 덕분에 나 또한 이만큼 성장할 수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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