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_아, 공자형! 어떻게 살아야 해?

논어 위정 편 제4장 공자가 살아온 삶의 단계

by 주루주루

고전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다음의 구절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지어학),

30세에 자립하였으며(립),

사십이 되어 의심하지 않게 되었고(불혹),

오십이 되어 천명을 알게 되었으며(지천명),

육십이 되자 귀가 순하여졌고(이순),

칠십이 되자 내 마음대로 하여도 규범을 넘어서지 않게 되었다.(종심소욕불유구)


吾十有五而志於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感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위 구절 전문을 들어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지어학, 립,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소욕불유구라는 단어는 각 나이대의 별칭으로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특히 불혹과 지천명은 40대와 50대를 지칭하는 단어로 널리 쓰인다.

이전에는 나도 이런 단어들을 제대로 된 뜻을 모른 채 그저 나이를 지칭하는 말로 생각 없이 써왔다. 하지만 고전을 공부하고 이 단어들의 가지고 있는 함의를 알게 되면서 이 단어들을 입에 올리기가 다소 조심스러워졌다. 오늘은 이 나이를 지칭하는 단어들의 뜻을 제대로 알아보고, 지금 이 시대에 이 단어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지어학(志於學)’은 글자 그대로 학문에 뜻을 두었다는 말이다. 논어를 해석한 송대 성리학자 주희의 주석을 보면 옛날에는 15세가 되면 ‘대학’이라는 상급학교에 진학했으므로 이때가 되어서야 ‘대학의 도’, 즉 위정자가 백성을 다스리는 도를 배우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니 공자 역시 15세가 되어 대학에 들어가면서 이러한 학문에 뜻을 두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을 지금 시대에 맞게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거의 15세는 사회적으로 성인이 되는 나이였다. 그러므로 이를 현대사회에 적용시켜 본다면 청소년기를 벗어나 어엿한 성인이 되는 20세 전후가 예전의 15세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이 나이에 우리는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미성년자에서 벗어나 성인이 되어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아갈 지에 대한 고민과 준비를 한다. 따라서 현대적 의미의 ‘지어학’은 단순히 ‘학문’에 뜻을 두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내가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잡는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립(立)’은 ‘자립’의 의미이다. 주희는 ‘자립’을 하게 되면 지키는 것, 즉 자신의 생각이 견고해지고, 뜻하기(인생의 방향 설정에 대한 고민)를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은 20대에 미래에 대한 방향을 설정하고 준비한 끝에 30대가 되어 드디어 부모를 벗어나 홀로서기를 하여 직업을 가지고 그곳에서 나에게 주어진 일을 우선 열심히 해 나가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부모로부터의 물리적, 정신적 독립이다.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는 어엿한 독립된 존재로서 사회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내는 것, 진짜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자립인 것이다.


‘불혹(不感)‘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일까? 주희는 이에 대해 ‘사물의 당연함에 대해 의심하는 바가 없어지면 앎이 분명해져서 자신이 뜻하는 방향으로 가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20대에 형성된 자신의 생각, 즉 삶의 가치관이 30대에 사회 속에서 얻는 경험들을 통해 더 다듬어지고 단단해져서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생각할 것도 없이 묻어 나온다는 말이다. 40대는 20대의 배움과 30대의 경험이 합쳐져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증폭되는 시기이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자신감이 아니라 좌절을 겪기도 한다. 나와 같은 경우에도 이때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향을 의심하고 수정하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런 결정마저도 ‘불혹’, 즉 의심하지 않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 역시 나의 가치관이 견고해짐에 따라 어떤 확신을 가지고 움직인 것일 테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의심하지 않는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존재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어엿한 독립된 인간이 된 것이다.


‘지천명(知天命)‘이란 무엇일까? 사실 나는 아직 40대이기 때문에 내 경험에서 50대를 이야기할 순 없다. 그러나 40대 중반의 나이에 50을 바라보며 어렴풋이 ’지천명‘이 무엇인가를 짐작하자면,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아닐까 한다. 사람에겐 ‘역량’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잘하고, 또 어떤 사람은 운동을 잘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나서길 좋아하고 나서서 하는 일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주목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모든 것이 ‘역량’이라는 것이고, ’분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분수를 왜 오십이 되어서야 말하는가? 그것은 자기가 선택할 수 없는, 부모가 부여한 환경에서 벗어나 자신의 선택에 의한 삶이 그제야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부모의 재력과 권력을 바탕으로 어떤 자리에 서게 된 자들도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을 포함한 것이 그의 분수인가?’ 나의 대답은 서글프지만 그렇다는 것이다. 삶은 공평하지 않다. 아무리 공평한 세상을 꿈꾸더라도 끝내 그렇게 될 순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인류가 사회를 이루고 살아온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하지만 위로가 되는 것은 그런 재력이나 권력에 의한 자리는 삶, 그리고 분수의 외연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선망받는 자리에 있는 이가 한순간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재력과 권력으로 나락까지 떨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 버티고 서있더라도 부끄러워야 할 상황에 놓여 비난을 받는다. 그런 경우 그가 한 실수는 자기 분수를 모르고 한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분수에 넘어서는 자리에 있으면서 자기 분수대로 행동하니 외면과 내면이 걸맞지 않아 탈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의 내면적 역량, 즉 분수는 오롯이 자기가 형성한 자신의 몫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다녀도 부끄러운 어떤 짓을 했다면 보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것이 부끄러운 것임을 알고 있다. 다만 자신을 속이며 남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매우 어리석고 오만한 짓이다. 내가 하는 생각은 남들 역시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이 사람은 ’지천명‘을 하지 못한 것이다.


나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난다. ‘이순’과 ‘종심소욕불유구’는 먼 미래의 나에게 그 정의를 맡겨두고자 한다.


20대엔 공자가 말하는 ‘분수’를 잘못 이해하여 태어난 환경대로 살라는 말인 줄 알고 혼자 공자를 미워했었다. 신분제 사회에서 양반은 양반으로, 노비는 노비로 살라는 말로 여겨, 지금 시대에도 그저 태어난 환경대로 살아야 할 뿐 노력한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보니 그런 말이 아니었다. 나의 삶을 열심히 살고, 그렇게 만든 오롯한 내 삶의 분수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옳지 못한 방법으로 작위 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말이었다. 공자는 ’부유함을 내가 구할 수 있다면 채찍을 들고 길을 트는 일이라도 하겠지만, 구할 수 없는 것이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이 공자가 생각하는 분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에 끌리는 것을 하고, 하면서 편안하고 즐거운 것, 그것이 분수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공자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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