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읽기_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프리뷰

국립중앙박물관_‘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을 보기 전에…

by 주루주루

내가 경제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2013년부터 코로나가 창궐한 2022년까지 꾸준히 지켰던 개인적인 다짐이 있었는데, 휴가든 출장이든 한 해 한 번씩은 해외에 다녀온다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해외에 나가 본 경험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직업이 정해지고, 바쁜 일정을 쪼개 다녀온 외유는 이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있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 동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 대해 그리고 나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새롭게 사유하고,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삶에 동기를 부여하게 했다.

오스트리아도 바로 그 기간에 다녀온 곳이다. 생각해 보니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의 일이다. 비엔나와 나의 첫 만남은 영하 18도의 무시무시한 추위와 엄청난 폭설이었다. 온 시내 교통이 거의 마비될 정도의, 한국에선 본 적 없는 폭설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 우여곡절 끝에 호텔에 도착했더랬다. 그렇게 도착한 호텔에서 추위와 허기에 지쳐 쇠고기(beef) 스튜를 시켰는데 비트(beet) 수프가 나와(그곳은 채식식당이었다!) 첫끼니로 빨간 채소죽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또 생필품을 사기 위해 잠시 들렀던 슈퍼마켓에서 직원에게 인종차별을 당해 작은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밖에 이러저러한 일들로 나에게 비엔나는 그리 좋은 기억의 도시는 아니다. 추위, 눈과 함께 우중충한 날씨, 싸늘한 인심의 사람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비엔나였다. 하지만 비엔나 여행에서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으니, 바로 세계적인 대작들을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브뤼헬, 보쉬,루벤스, 벨라스케즈, 베르메르, 렘브란트, 클림트, 쉴레 등등. 이루다 말할 수 없는 거장들의 작품을 빈에 머물던 2박 3일 동안 원 없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이런 작품들을 국내에서도 볼 기회가 생겼다. 재작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오스트리아 유수 박물관과의 협업 전시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번엔 빈미술사박물관의 작품이 오더니, 올해는 레오폴트 미술관 소장품이란다.

늘 해오던 대로 리뷰를 하자면 이 전시들을 미리보고 글을 남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예매율로 인해 일정을 맞추기 어려운 관계로(지금 나는 지방에 있다) 먼저 미술사와 관련한 사라진 기억의 조각을 모으고 난 뒤 전시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하는 김에 나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그 기억을 공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하여 글을 올려본다.


우선 레오폴트 미술관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기억부터 상기시켜 보자. 주로 20세기 이전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는 빈 미술사 박물관과 달리 레오폴트 미술관은 1900년을 전후해 활동한, 미술사에서는 비엔나 분리파, 독일 표현주의에 속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주로 소장된 곳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 등이 그들로, 이 중 레오폴트 미술관의 에곤 쉴레 컬렉션은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미술관의 이름인 레오폴트는 컬렉션을 수집한 이의 이름이다. 1925년에 태어나 2010년까지 평생을 비엔나에 살았던 의사로, 그가 사모았을 당시엔 아직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던 쉴레의 작품을 먼저 알아보고 수집한 선구안이다. 실제로 레오폴트와 쉴레 사이에는 어떤 개인적인 관계도 없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작품 하나로 판단해 컬렉션을 이룬 셈이다. 시간이 지나 연구자들에 의해 에곤 쉴레가 재조명되면서 레오폴트의 컬렉션은 세계적 유명세를 탔다. 그리고 그가 노년에 접어들자 오스트리아 정부가 그의 컬렉션 보존을 위해 미술관 설립을 추진하였고, 그렇게 2001년 레오폴트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내가 비엔나를 방문한 것이 2013년이니 그때만 해도 이 미술관은 개관한 지 12년 밖에 안된 따끈따끈한 미술관이었던 것이다.(12년이라고 하면 오래된 것 같지만 유럽의 유명 박물관 대부분이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단 사실을 상기해 보시라.)


레오폴트 미술관 전시를 보기 전에 그 컬렉션이 탄생한 배경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1900년 전후 비엔나의 새로운 예술 풍조를 대변하는 이들의 위치를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900년 직전의 비엔나는 유럽 보수주의의 심장이었다. 비엔나가 속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지금의 독일어권 국가들을 아우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이루고 10여 개의 민족을 다스리고 있었다. 19세기 들어 민족주의가 대두하자 이 민족들은 각기 거세게 독립을 요구했다. 당연히 제국은 이를 억압했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정치에 무관심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예술, 특히 음악을 장려했다.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슈트라우스 등 저명 음악가들의 주 무대가 되었던 음악의 수도 비엔나라는 영광은 그런 배경 속에 탄생한 것이었다. 황제와 관료들의 탄탄한 전제주의와 이를 대하는 시민들의 무력한 태도가 오히려 예술을 꽃피우게 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유럽에 자유주의의 바람을 불게 한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는 계속해서 보수적 전제주의를 고집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그 전후처리를 위한 보수, 반동적 회의가 비엔나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도하에 유럽을 나폴레옹 전쟁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빈체제가 비엔나를 중심으로 구축되었고, 비엔나는 유럽 보수-전제주의의 심장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막을 수 없고, 변화는 불가피했다. 전쟁 복구를 위해 황제가 명령한 도시 재건 사업이 계기가 되어 비엔나에도 새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1857년 황제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파괴된 비엔나의 옛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원형도로(링슈트라세)를 건설하는 사업을 추진하라 명한다. 이를 추진하면서 링슈트라세 주변으로 제국의 권위를 상징하는 장엄한 공공건물을 세우도록 하는데, 바로 이 건물들 내부를 장식하는 과정에서 빈의 고답적 아카데미즘에 반발하는 예술가 그룹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분리파였다.

분리파라는 명칭의 의미는 말 그대로 기존 예술과 분리되겠다는 뜻이다. 이들은 당시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던 양식인 아르누보(독일에서는 유켄트슈틸-직역하면 젊은 양식)를 수용하여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려 했다. 아르누보 양식은 회화, 조각 등의 순수예술과 공예, 그래픽(잡지, 포스터의 삽화) 등의 응용 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필두로 예술계의 기존 경계와 질서를 타파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공예가 집안 출신이었던 클림트는 가족으로부터 받은 정신적 유산과 스스로 구축한 혁신적 생각으로 비엔나의 이런 움직임을 이끌었다. 이는 이후 에곤 쉴레나 오스카 코코슈카 같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가들의 정신적, 활동적 기반이 된다.

레오폴트 미술관 소장품의 대다수를 이루는 에곤 쉴레와 그의 동료들의 작품은 미술사에서 독일 표현주의라는 사조로 분류된다. 이들의 예술은 저 유명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이들이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볼 수 있는 억압된 본능과 무의식적 욕망을 표현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괴이한 이미지, 감정적 격동성, 폭력, 성적인 노골성 등을 예술에 표현했는데, 이런 태도는 이전까지 부르주아의 오락으로 부역하던 예술을 개인적 자아 표현의 영역으로 가져온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이는 사적 욕망과 공공 도덕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아, 몰락하는 제국과 그 보수적 분위기에 반발한 자유로운 자아의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 적으로 해석하면 위기에 처한 권위와 개별 주체 간의 갈등, 집단 오이디푸스적 반항과 새로운 자아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추구 등으로 어렵게 표현할 수 있다.(art since 1900에서 인용) 그러나 이들의 반항은 오스트리아적 전통을 반영하는 듯 무기력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먼저 이들의 기수인 클림트가 노년에는 부르주아들의 초상을 장식적으로 그리는 일에 몰두했고, 그 뒤를 이은 에곤 쉴레 역시 가정으로부터의 안정감을 얻으면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라 말할 불안 속 폭발하는 예민한 감수성을 상실했다. 오스카 코코슈카는 한때 퇴폐미술가로 낙인찍혀 망명길에 올라야 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으나 세계 전쟁 종식 후에는 안정된 삶 속에서 젊은 시절의 격정적 표현주의와 결별하게 된다.


자, 배경을 어느 정도 알아봤으니 이제 작가에 대해 상기시켜보고자 한다. 전시에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많은 작가들이 나오겠지만, 프리뷰에서는 레오폴트의 대표 컬렉션인 에곤 쉴레만 살펴보아도 충분할 듯하다.

에곤 쉴레는 부르주아 철도 공무원의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개인사 중 주목할 만한 부분은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15살 무렵 아버지가 매독으로 인한 광증을 일으켜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 아버지가 성으로 인한 병으로 발작하여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을 것이며, 그의 예술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에로틱한 성적 이미지를 탐닉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남성을 뒤틀리고, 왜곡되며, 무기력하게 표현하는 것은 성병으로 인한 아버지의 죽음에 영향받은 것으로 생각되며, 유독 미성년 여성을 탐닉하는 모습에선 남성을 경험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집착, 즉 매독과 같은 병을 옮기지 않을 여성에 대한 집착을 무의식 중에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물론 이런 성인식은 왜곡된 것이다)

그의 예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두 번째 사건은 미술학교를 다니던 18세 때, 당시 비엔나 예술의 혁신을 이끌던 클림트를 만난 것이다. 이제까지 교수로부터 악마적 재능을 가졌다 혹평을 받아온 쉴레에게 클림트는 그 천재성을 인정해 주었고, 이런 평가는 어린 쉴레의 자부심을 폭발하게 했을 것이다. 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펼쳐나가기 시작한 쉴레는 자화상을 대단히 많이 남기는데, 여기서 그는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자아에 대한 집착적 사랑, 자신에 대한 탐독을 표현한다. 나르시시즘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이 사랑은 당연히 건강한 자아로서의 자기 사랑은 아닌 듯하다. 일례로 1차 대전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 그를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여인(이 여인도 미성년자일 때 만났다)을 버리고 부르주아 가문의 여인과 결혼하고, 그것도 모자라 헤어진 여인에게 여름휴가는 당신과 보내고 싶다 편지를 보냈던 사실에서 그의 자신에 대한 이기적이며 왜곡된 사랑을 볼 수 있다. 또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 때론 상처받은 영혼처럼 뒤틀리고 절단되었으며 왜곡된 이미지로 표현하고(이 이미지는 솔직하지만 성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 때로는 꽃처럼 수줍고 아름답게 표현하는데 여기서도 스스로에 대한 양가적 감정의 갈등이 보인다.

에곤 쉴레는 1918년 스페인독감으로 사망하기까지 유화 300여 점, 드로잉과 수채화, 판화 3000여 점을 제작했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비엔나의 격변기와 맞물려 천재화가로 인정받아 명예와 부를 생전에 이미 얻었다. 하지만 사후의 그는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다. 나치에게 그의 예술은 퇴폐예술이었고, 너무나 짧은 활동기간과 요절 탓에 한동안 잊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다시 미술사에서 의미 있는 이름으로 올려준 것이 바로 레오폴트였다.


지금까지 레오폴트 미술관 전시를 보기 전의 프리뷰를 적어보았다. 막상 전시장에 들어가 보면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어떤 감동이 있을지 아직은 알지 못하지만 그 관람을 위해자료를 오랜만에 찾아보며 미술사의 재미를 새삼 느끼게 되어 개인적으론 이 과정조차 의미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 작품에 대한 내용보다 배경에 더 많은 노력을 할애한 것은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은 전시장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개인적 생각 때문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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