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X저작권위원회 - 원작:인어공주
3.
마녀는 큼큼 목소리를 다듬었다. 그리곤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엘리제의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명백한 불만이 담긴 고동이었다. 그러나 이런 질투를 겉으로 드러내 포악한 여자로 찍히긴 싫었다. 질투하는 여자는 꼴사납다고 상점가를 지나가던 상어 무리가 그랬으니까. 그래서 엘리제는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걔가 몇 시에 성 밖을 나와 바깥 구경에 나설 줄 알고?”
“지금껏 네 명의 공주 모두 밤중에 외출했어.”
“너 그새 성의 문지기를 꼬드겨서 그런 정보를 알아냈어?”
엘리제의 표정이 와락 구겨지고 언성이 순식간에 높아졌다.
“너 말이야. 그런 걸 스토킹이라고 하는 거야. 알아? 이 기분 나쁜 자식”
스토킹이라는 단어에 마녀가 화들짝 놀랐다. 평소답지 않게 잔뜩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아냐! 그저 지금껏 공주들이 외출하고 나면 그걸 신문에서 기사로 다뤘으니까. 앞선 일의 결과를 통해 다음 일을 예측해봤을 뿐이라고.”
“그래도 스토킹이야 멍청아!”
식탁을 박차고 일어난 엘리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고작 어릴 적, 아직 마녀의 제자로 발탁되기도 전, 늙은 정원사의 손자였던 시절, 잠깐 만난 인어 공주가 뭐라고. 높은 성안에서 세상 물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해 빠진, 아니 멍청해 빠졌을 공주가 뭐라고. 엘리제는 한 마디 더 쏘아붙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고개를 툭 떨군 마녀의 침울한 얼굴을 보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공개된 정보로 추론만 했을 뿐이야. 그리고… 뭘 어떻게 해 볼 생각도 없어. 그저… 멀리 서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혹시라도 위험에 빠지면 도와주고 싶어서… 먼발치서 한 번만 보고 돌아올게.”
그날 밤. 엘리제는 문밖을 나서는 마녀의 검은 망토가 펄럭이는 것을 침실의 작은 창으로 바라보았다. 바보. 밤에는 햇빛이 없어서 망토를 쓰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지만 이 사실은 안 알려 줄 거야. 엘리제는 하얀 이불을 홱 하고 머리까지 덮어썼다.
초록 수풀이 우거진 숲에 달빛을 받은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바다 표면에서 달빛이 아닌 또 다른 빛이 햇빛처럼 부서졌다. 인간의 배에서 나오는 불빛이었다. 절대 인간과는 마주쳐서도 말을 섞어서도 안 된다는 스승의 말이 머리에서 위험경보처럼 깜빡였다. 하지만 마녀는 만약 저 배가 위험한 자들이 탄 배라면 인어 공주보단 제가 마주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마법을 쓸 수 있지만 인어 공주는 그렇지 않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마녀는 천천히 수면으로 향했다.
배의 밑바닥에 바짝 붙어 영약을 천천히 마셨다. 잠시 후 배안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마녀의 귀에 생생하게 들어왔다.
“왕자님의 정부가 또 바뀌었다지?”
“이번에는 어디 남작가의 딸이라던데? 어디 저리 얼굴값을 해서야. 원…”
“그래도 그 출중한 외모 덕에 청혼하는 다른 나라 공주들이 줄을 섰지 않는가.”
“그래. 혹시 아나. 왕자님이 결혼이라도 잘해서 나라에 보탬이 될지.”
“그래도 이걸 보게. 생일 연을 사치스럽게 배에서 열다니… 여기에 들어간 폭죽 값이면 경계근무를 하는 전체 병사 1년 치 식비는 될 걸세.”
“쉿. 왕자님이 갑판으로 나오고 계시네. 다들 상어 밥이 되고 싶지 않으면 입조심하게”
마녀는 안심하며 다시 물밑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물고기를 잡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인어 공주가 이들을 발견하고 호기심을 가진다 하더라도 위험할 것은 없었다. 그때 저 아래에서 뭔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마녀는 황급히 초록 수풀 틈으로 몸을 숨겼다. 찬란하게 흩날리는 머리카락. 백합 화관 사이로 진주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화려한 화관도 인어 공주 그녀보다 빛나진 않았다. 하얀 백합이 아니라 그녀의 정원에만 피는 붉은 꽃으로 장식한 화관이었다면 그녀와 더 잘 어울렸을 텐데. 마녀는 수풀의 그늘 틈에서 귓가를 붉혔다. 인어 공주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없이 아름다웠다.
불빛을 쫓아 바다 표면으로 향하는 인어 공주의 뒷모습 위로 지금보다 조금 더 작았던 인어공주의 뒷모습이 겹쳐 보였다.
할아버지는 인어 왕궁의 정원사였다. 미카엘은 종종 출근하는 할아버지를 쫓아 함께 집을 나섰다. 성에서 일하는 사용인들 모두가 미카엘에게 친절했다. 삼엄한 표정으로 성의 경비를 서는 기사들도 어린 미카엘에겐 웃어주었고, 할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다른 정원사들도 미카엘을 제 가족처럼 대했다.
다만 할아버지는 인어 왕족에겐 사소한 것으로도 쉽게 밉보일 수 있으니 마주치지 말라고 했다. 특히 하얗게 머리가 샌 인어를 피하라고 당부했다. 그날도 성 안쪽에 자리한 정원을 손질하는 할아버지의 곁에서 놀고 있던 날이었다.
갑자기 눈앞에 처음 보는 빛깔의 작은 물고기 떼가 정원수 사이로 나타났다. 어린 미카엘은 그 물고기가 너무나 신기해서 물고기를 쫓아 걷기 시작했다. 물고기가 천천히 유영하다 점점 빨리 헤엄쳤다. 미카엘의 다리도 점점 빨라졌다. 이윽고 숨이 찼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쉬며 모퉁이를 꺾었을 때, 물고기는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하얀 머리에 장식을 주렁주렁 매단 인어가 정원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대로 서있으면 안 됐다. 곧 마주칠지도 몰랐다. 미카엘은 살금살금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물컹한 게 밟혔다. 그제야 저보다 훌쩍 큰 그림자를 발견한 미카엘의 등에서 땀이 주르륵 흘렀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미카엘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4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