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그리고 인어공주-4

브런치X저작권위원회- 원작: 인어공주

by 신인인

4.


딱 한번, 먼바다에서 본 은하수가 눈앞의 작은 눈에 콕콕 박혀 있었다. 눈의 주인은 어린 인어 공주였다. 너무 어릴 적에 봐서 흐릿해졌던 기억 속 은하수가 눈앞에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다.


은하수를 처음 마주했던 때 느낀 황홀함이 다시금 미카엘의 전신을 휘감았다. 미카엘은 한참을 그렇게 인어공주를 바라봤다. 그 아름다운 인어는 손을 들어 올려 쑥 미카엘의 머리를 바닥으로 눌렀다. 미카엘은 졸지에 정원의 하얀 꽃 더미와 인어 공주 사이에 갇혀 쪼그려 앉은 모양새였다.


“공주. 이곳에서 무엇하느냐?”

하얀 꽃 더미 너머로 나이 든 인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카엘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심장이 콩닥거리며 뛰었다.


“할머니. 할머니가 키우신 꽃이 너무 예뻐서 잠시 보러 왔어요.”

“그래. 오늘은 손님이 있어서 지금은 더 길게 얘기를 나누지 못하겠구나. 이따가 보자. 아가.”

“네. 이따가 뵈어요. 할머니.”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미카엘은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인어공주가 허리를 숙여 미카엘과 시선을 맞췄다.


“네가 정원사의 손자구나? 귀엽다고 소문이 자자해서 늘 궁금했어.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몰랐네. 여긴 할머니의 정원이야. 어서 나가자.”


인어공주는 미카엘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미카엘은 그녀에게 붙잡힌 손을 한 번, 장막처럼 펼쳐진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걸 한 번 번갈아 보았다. 나풀거리는 모습이 마치 동화 속 천사 같았다. 천사는 행운과 사랑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어린 미카엘은 그날 처음 천사를 만났다.


그 뒤로 인어공주는 종종 할아버지를 따라온 미카엘과 함께 놀아주었다. 때로는 자신의 붉은 장미 정원에 피어난 꽃을 선물해주었다. 그날도 평범하게 인어 공주와 시간을 보내고 작은 장미 다발을 선물 받았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인사를 했다. 인어 공주도 ‘다음에 또 만나’하고 말했다. 그러나 다음은 없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미카엘은 혼자가 되었다.


마녀는 너울거리는 물결과 흐트러지는 인어공주의 머리카락. 힘차게 움직이는 그녀의 꼬리를 멀리서 바라봤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일에 호기심 가득한 인어 공주가 얼마나 눈을 빛내며 저 인간들의 배를 보고 있을지 상상한 마녀는 망토를 더 깊숙이 눌러쓰며 옅게 웃었다. 그때였다.


바다의 표면이 거세게 일렁이더니 번쩍하고 온 세상이 밝아졌다 다시 어두워졌다. 우르릉 매서운 소리를 내며 폭풍이 몰아쳤다. 배가 파도를 타고 높게 솟았다 가라앉는 모습을 보였다. 순식간에 배가 기울어지더니 우지끈 소리가 나면서 배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배에 실려 있던 집기와 배에서 부서진 나무파편이 바다로 쏟아졌다. 마녀는 황급히 품 안에서 영약을 찾았다. 인어 공주의 곁으로 나무판자들이 소용돌이쳤다. 금방이라도 인어 공주와 부딪칠 것 같았다. 마음은 급한데 영약이 담긴 주머니는 달그락 거릴 뿐 좀처럼 매듭이 풀리지 않았다.


‘안 돼! 제발’

마녀는 기도하며 손을 빨리 움직였다. 이윽고 풀린 주머니에서 영약 한 병을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손으로 크게 원을 그려 커다란 보호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숨결을 불어 인어 공주를 향해 보호막을 보냈다. 자신의 옆으로도 나무판자 떨어지고 있음을 알지 못했던 마녀는 그의 보호막이 인어 공주를 감싸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머리 위로 드리운 그림자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쿵. 머리에 충격이 가해지고 마녀는 바닷속 깊은 골짜기로 추락했다.


엘리제의 이불이 들썩거렸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누운 엘리제는 결국 하얀 비단이불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시간이 몇 시인데 안 돌아오는 거야!”


씩씩 거리며 숨을 내뱉은 엘리제가 집 앞을 서성였다. 조금 있으면 해가 뜰 시간이었다. 햇빛이 살에 닿으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끼는 마녀가 이 시간이 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엘리제의 마음도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는 아무리 늦어도 꼭 해가 뜨기 전에는 돌아왔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엘리제는 그를 찾으러 나서기로 했다.


집 앞에 펼쳐진 잿빛 사막을 반쯤 지난 엘리제가 갑자기 다급하게 뛰었다. 까만 형제가 터덜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바보 같은 마녀 같으니라고! 이제는 시간도 모르는 거야? 벌써 해가 다…”


엘리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가까이서 본 마녀의 망토는 군데군데가 찢어져 있었다. 안에 갖춰 입은 옷도 마찬가지로 너덜거렸다. 햇빛에 드러난 살은 벌써 까뭇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소리 지르지 않아도 돼. 다 들려. 엘리”

“바보 같으니라고! 스승님이 넌 절대 햇빛을 보면 안 되는 저주에 걸렸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이 바보가!”

“미안해. 조금 늦었어.”

“어쩌다가 거지꼴이 되어가지고는!”


엘리제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살이 타들어가는 와중에 뭐가 좋다고 웃는지. 그러니까 괜히 인어 공주 같은 걸 보러 간다고 해서. 보나 마나 인어공주를 돕다가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엘리제는 코끝이 매웠다. 목은 점점 콱 막히고 눈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엘리제는 이를 악 물고 마녀를 부축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를 집으로 데려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엘리제는 온 집안을 뒤져 나온 영약을 모두 마녀의 상처에 부었다.


“그렇게 내 상처 치료에 다 써버리면 안 돼.”

“안되긴 뭐가 안돼야! 너 아프잖아.”

“엘리. 알잖아. 스승님이 그랬잖아. 햇볕에 탄 상처는 언젠가 나아”

“하지만 다 나을 때까지 고통스럽겠지.”


엘리제는 마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약을 마구 쏟아부었다. 평소라면 제 힘을 이용해 엘리제를 막았을 마녀지만 지금은 그럴 힘도 없는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로만 말리는 게 엘리제는 더 서글펐다. 이윽고 두 개의 상처가 남고 한 병의 영약이 남았다. 엘리제가 마지막 병을 열려던 순간, 마녀가 엘리제의 손에서 영약을 낚아챘다.


“엘리. 정말 급한 손님이 올 수도 있어. 그때를 대비해서 남겨둬야 해.”

“하지만 네 상처가…”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나아. 걱정하지 마.”


마녀의 큰 손이 엘리제의 손을 토닥였다. 그 손길이 꼭 난 괜찮다고. 인어 공주를 보고 와서 힘이 나니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엘리제는 분했다. 내가 조금만 더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이 바보 같은 미카엘이 아니라 내가 마녀가 되었을 텐데. 바보 같은 미카엘은 왜 마법 공부만 잘해서. 내가 마녀가 되었다면 내가 만들 수 있으니 이런 영약, 너한테 다 써버렸을 텐데. 엘리제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엘리. 미안한데 나 조금만 잘게.”


마녀는 몸의 회복을 위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눈을 다시 뜬 건 여러 날 밤이 지나고였다.

.

.

마녀가 잠이 든 동안 엘리제는 마녀를 대신해 가게를 열었다. 마녀의 검은 망토를 빌려 입고 마녀인 척하며 자질구레한 마도구를 찾는 이들에겐 제값을 치르고 물건을 팔았다. 영약이 필요하다고 찾아오는 이들은 대부분 터무니없는 이유로 약을 찾거나 충분한 돈을 들고 오지 않았으니 적당히 얘기를 듣다가 쫓아버리기 일쑤였다. 영약은 고작 한 병 남았고 그걸 아무에게나 팔 수는 없었다. 영약을 만드는 날은 아직 멀었고, 남은 영약 한 병은 마녀의 고통과 맞바꾼 것이었으니 꼭 중요한 일에 쓰여야만 했다.


어느 날 반길 수 없는 손님이 찾아왔다. 신문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너울 치는 머리카락은 결 좋게 빛났고 매끈한 피부는 빛을 비춘 진주처럼 투명했다. 세상의 험한 면은 한 개도 보지 못한 듯 순진무구한 얼굴. 인어공주였다. 엘리제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마녀의 집]에 들어선 인어 공주가 탐탁지 않았지만 영약을 찾는다는 목소리에 일단 자리를 권했다. 그리곤 꼴도 보기 싫지만 저 겁에 질린 얼굴을 행여나 잠에서 깨어난 마녀가 볼까 긴장을 풀어주는 따뜻한 차도 내왔다. 따뜻한 차를 두 번, 세 번 홀짝인 그녀가 제 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실은 바깥 구경을 나간 날 왕자님을 만났어요. 그런데 폭풍우가…”



5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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