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병원 가기
지난 1월, 조용한 평일 오후였다.
남편이 재택을 하는 날이라 점심으로 카레를 만들어 먹으려고 재료 손질을 하던 중이었다.
감자를 깎는데 감자가 물렁해서 그런가 잘 깎이지가 않았다.
눈 깜짝하는 순간. 엄지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감자껍질이 아닌 살점이 도려져 나가고 말았다.
-앗!!
다급하게 물로 상처부위를 씻고 눈에 보이는 키친타월로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남편에게 가서 손가락을 다쳤다고 얘기를 했다.
-뭐? 어디 봐봐!
움켜잡은 손을 떼는 순간 키친타월 밖으로 피가 번지고 있었다. 순간 무서웠다.
-하.. 진짜.
깊어지는 남편의 한숨 소리.
남편이 비상약 서랍에서 치료할 거즈와 소독약, 연고를 갖고 왔다.
소독을 하는데 찌릿. 쓰라리고 아팠다.
-아.. 속살이 다 보이데. 대체 어쩌다 이런 거야? 괜찮아? 안 아파? 병원 가야 하지 않겠어?
-괜찮아. 지혈하면 괜찮을 것 같다. 일단 지혈되게 붕대만 세게 감아줘.
-아휴 정말. 속상하게.
피를 닦아내는데 피가 계속 솟아나는 게 보였다. 관절 쪽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속살이 보였다.
그때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시간 뒤, 감았던 붕대를 풀었다.
이제 지혈이 되었겠지?
하지면 여전히 지혈이 되지 않았다.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남편이 갑자기 나가더니 약국에서 베었을 때 바르는 연고와 거즈 등을 사 왔다. 한숨을 쉬며 연고를 발라주었다.
상처부위는 계속 욱신욱신거렸다.
다음 날 아침, 지혈이 되었기를 바라며 감았던 거즈를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혈이 되지 않았고 결국 병원에 가기로 했다.
아직 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남편이 병원 여기저기에 상황 설명을 하고 진료시간과 치료 가능여부 등을 확인하고 집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번역기를 돌려가며 문진표를 작성했다. 한국에서는 쓱쓱 작성하던 문진표이건만 왜 이리 어려운 건지.
드디어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은 진료를 시작하기 전 일본어가 어느 정도 가능한지 확인을 하셨고, 중간중간 설명을 해주며 이해를 했는지 물어보셨다.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최대한 쉽게 설명해 주려고 노력하시는 것 같았다.
다행히 지혈이 되었고 연고를 발라주셨다.
10일 정도 후면 나을 거라고 물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라고 하셨다.
진료를 금세 끝났다. 보험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병원비 전액을 지불해야 했다. 거기다 이 병원은 카드가 되지 않았다. 오로지 현금 결제만 가능했다. 세상에 병원인데 현금만 받다니 놀라웠다.
결제를 하고 나가려는데 간호사분이 나중에 보험이 적용이 되면 영수증을 갖고 다시 병원에 오라고 했다. 오늘 적용되지 않은 보험 부분을 적용하여 일부 금액을 환불해 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일본에서의 첫 번째 병원 진료가 종료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보험 드디어 적용이 되었다. 예전에는 보험증서를 주었지만 올해부터 마이넘버카드에 보험 기능이 추가가 되면서 보험증서 발행이 되지 않았다.
마이넘버카드를 발급받기 전, 사용할 수 있는 보험확인서가 우편으로 배송되었다.
그래서 지난달에 받은 병원비 영수증과 마이넘버카드, 그리고 보험확인서를 갖고 다시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 가기 길에 계속 머릿속으로 물어볼 말을 되뇌고 사전으로 단어를 찾아보며 갔다.
똑 부러지게 말하고 와야지.
연습은 효과가 있었다. 준비했던 말을 간호사에게 하니 잠시 앉아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보험확인서와 영수증을 제출하고, 마이넘버카드는 카드 등록기에서 등록 처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10분 정도 지난 후, 간호사가 호명을 했다.
기존에 지불했던 금액을 돌려주고, 보험 처리된 영수증을 보여주며 이 금액을 다시 내면 된다고 했다.
(알아서 환불 금액을 돌려주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원래 금액을 돌려받은 후, 보험 처리 후 금액을 지불을 했다.
업무를 끝내고 나오는 길. 발걸음도 가볍다.
용돈 받은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남편에게 환불 처리됐다고 연락을 했다. 공돈이 생긴 기분이라고 말을 했다 한소리 들었다.
철없는 생각이었나? 용돈 받은 느낌이라는 건?
뭐 어떤가, 어쨌든 나는 또 하나의 일을 처리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고 기분도 좋아진 것을.
비록 나의 엄지손가락에는 상처가 남긴 했지만 잘 아문 것 같으니 그냥 영광의 상처가 하나 생겼다 생각하고 다음부터 조심해야지.
아직 감자를 깎는 건 조금 무섭긴 하다. 기억이라는 게 쉽게 지워지지는 않는 것 같다.
일본어 단어는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