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Oct 28. 2023

흔(하지) 않(은) 남매와 흔한 남매

드디어 올 것이 ?

2023. 10. 27.

< 사진 임자 = 글임자 >


"누나, 나 비번 좀 알려 줘."

"......"

"누나!!!"

"아, 왜?"

"나 EBS 비번 좀 알려 주라니까."

"나 지금 문제 풀고 있어."

"진짜! 좀 알려 주라니까."

"이거 하고."

"진짜 너무 하네, 알려줘 좀!"


아슬아슬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쾅하고 부딪칠 것 같았다.


"합격아, 비번 좀 알려 달라잖아."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너는 그것도 모르냐?"

"깜빡했나 봐. 가끔 생각 안 날 때도 있잖아. 지금 그런가 봐. 네가 좀 알려줘."

"아휴, 진짜!"

"지금 알려 달래. 얼른 알려 줘."

"그러면 그동안 어떻게 EBS 봤냐? 비번도 모르면서?"

"갑자기 생각이 안나는 거겠지. 엄마도 어쩔 땐 집 비번이 생각 안 나고 헷갈릴 때 있어. 알려줘라 좀."

평소의 딸답지 않게 그날따라 제 동생에게 너무 호전적이었다.

말끝마다 날이 서 있었고 표정도 하루 종일 어두웠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건 그 점만이 아니었다.

"엄마, 오늘 아침밥 안 먹고 가면 안돼?"

"그럼 배고플 텐데. 오늘은 체육도 있는 날인데, 기운 없어서 체육 어떻게 하려고?"

"괜찮아. 그냥 갈래."

"그래, 안 먹겠다는데 억지로 먹으라고 할 수는 없지. 그럼 그렇게 해. 굶고 가면 배고픈 거야 당연한 거고. "

매일 아침마다 나보다도 더 많이 밥을 먹던 딸이었다.

거의 한 그릇씩 꼬박꼬박 비우던 딸이었다.

가리는 반찬도 없이 주는 대로 곧잘 먹던 아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아침밥을 거부했다.

"어차피 지각이야, 그런데 어떻게 밥을 먹고 가?"

"그건 네가 늦게 일어났으니까 지각인 거지 엄마가 밥을 안 차려 줘서 그런 건 아니잖아.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서 준비했으면 지각은 아니지."

그리하여 아침밥도 굶고 오후에 집에 온 딸은 계속 힘이 없어 보였다.

"합격아, 혹시 요즘 무슨 일 있어?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인다. 엄마한테 얘기해 봐."

"없어."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엄마한테 꼭 알려 줘야 돼. 너 말하고 싶을 때 해."

"알았어."

대답은 하면서도 계속 시큰둥했다.


그날 저녁 남매가 EBS강의를 들을 준비를 할 때였다.

"누나, 알람 좀 꺼! 왜 계속 안 꺼? 시끄럽잖아."

동생이 다짜고짜 항의를 해도 알람을 끌 생각을 안 했다.

"어휴, 진짜, 누나 왜 그래?"

"내가 뭘?"

"시끄러운데 왜 알람을 안 끄냐고? 여기 누나 혼자만 있는 거 아니잖아? 나 방해된다고."

아무리 동생이 몰아세워도 꿈쩍도 안 했다.

결국 아들이 껐던가?


"엄마, 누나 강의 틀어놓고 슬라임 하고 있어."

신고 정신 강한 아들이 내게 제보했다.

"너도 그런 적 있잖아. 왜 나한테만 그래? 그리고 이거 슬라임 아니거든. 클레이거든."

"내가 언제?"

"저번에 그랬잖아. 너도 그래놓고 왜 그래?"

"난 안 그랬어."

"안 그러긴 뭘 안 그래. 몇 번이나 그랬으면서."

"안 그랬다니까!"

"엄마, 쟤도 옛날에 강의 틀어 놓고 종이접기 하고 그랬어."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남매 사이에 드디어 내가 출동할 때다.

"얘들아, 남에 대해서 뭐라고 할 거 없다니까. 자기만 자기 할 일 하면 되는 거야. 그럼 아무 문제없어. 서로 상대방보고 뭐라고 하지 말고. 판단은 엄마가 할게. 너희는 각자 자기 할 일 해. 알았지?"

남매가 서로를 보는 눈빛이 평소와는 달랐다.

어디부터 문제가 생긴 거지?

언제부터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분명히 뭔가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동생에게 세상 다정한 누나였는데 순식간에 저렇게 쌀쌀맞게 변해버리다니. 내가 알던 딸이 아니었다.

어쩌나 사이좋게 잘 지내는지 요즘 저런 애들 없다고 보는 사람마다 말했는데, 그날은 영락없이 '요즘 그런' 흔한 남매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들이 슬그머니 내게 와 귀에 속삭였다.

"엄마, 진짜 누나 이상해. 괜히 나한테 신경질 내고 그래. 사춘긴가 봐. 아휴. 사춘기에는 원래 저래. 잘 나가다가 변덕도 부리고 그런 거야, 별 것도 아닌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나도 '사춘기와 성' 책에서 다 봤어. 그러니까 엄마가 이해해"

열 살 나이에 벌써 그 원인을 파악해 버리다니!

그렇다, 아들은 사춘기를 책으로 배웠다.

그래, 호르몬이 한 일이야.

본래 딸이 그런 애가 아니었잖아.

열두 살, 슬슬 시작되고 있는 걸까.




작가의 이전글 난 두 달 전부터 행복해질 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