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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13. 2023

전과를 잊지 마세요

2023. 11. 8.

< 사진 임자 = 글임자 >


"거기도 결혼 안 한 사람들 많지?"

"좀 있지. 여자들이 더 결혼 안 한 것 같더라. 남자는 별로 없으니까."

"요즘 사람들은 꼭 다 결혼하려고는 안 하니까. 자기 친구도 아직 결혼 안 했잖아."

"응. 아직 안 했어."

"하긴 내 친구 중에도 안 한 애 있는데. 자기도 나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결혼도 못하고 있었겠지?"

"또 무슨 소리야?"

"그때 아버님이 상견례하자마자 당장 결혼시키자고 그랬잖아."

"나 좋다고 줄 선 여자들 많았어."

"잘못 섰겠지. 난 줄도 안 섰는데."

"자기가 몰라서 그렇지 나 좋다는 여자 많았어."

"싫다는 여자가 많았던 거 아니고?"

"하여튼 너희 엄마는 진짜."


가족이 거실에 다 모이면 자주 등장하는 대화 주제다.

어쩌다 엄마 아빠는 결혼씩이나 하게 되었나.

물론 아이들은 시큰둥했고 관심도 없어했지만 말이다.

당사자인 남편과 나만 뜬금없이 불꽃 튀기며 서로 내가 아니었더라면 당신은 '결혼도 못했을 것'이라며 아무런 영양가 없는 소리만 하는 것이다.

줄 섰다는 실체도 모르는 그 여인들에게 양보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엄마가 아니었더라면 아빠는 지금까지 결혼도 못하고 우체국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매일 울면서 일하러 다녔을 걸?"

"그건 아니지."

"아니긴 뭐가 아니야? 결혼하고 일주일만에 우체국 그만둬놓고. 그때 결혼 안 했어도 일 그만둘 수 있었을까? 나라도 있었으니까 그만둔 거 아니야? 어떻게 결혼하자마자 그만 둘 생각을 했어? 다 철저히 계획적이었지? 결혼하기 전까지는 아무 말 없다가 신혼여행 갔다 오자마자 말이야. 혼자 몸이었으면 그렇게 그만둘 수 있었을까 과연? 아마 그렇게 못했을 걸?"

"하긴 당신 말 듣고 보니 그랬을 수도 있겠다. 일리 있네."

"멀쩡히 공무원 합격해 놓고 그만둔다고 했다면 아버님이 뭐라고 하셨을까? 그것도 결혼한 지 일주일 만에 말이야. 아무튼 내가 있어서 결혼도 할 수 있었고 우체국도 그만둘 수 있었던 건 사실이잖아. 나 아니었으면 결혼도 못하고 우체국도 그만 못 두고 맨날 보험 파느라 스트레스받으면서 살았을지도 몰라."

"그래. 그랬을 수도 있지. 그렇다고 치자.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잊을 만하면 나의 퇴직과 관련해 엉뚱한 소리를 하는 남편 못지않게 나도 가끔씩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그의 전과를 들추곤 한다.

남편이 뭔가 착각하고 사는 것 같아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혼자만 생각한다.)


내가 일을 그만둔 것에 대해 느닷없이 듣기 거북한 말을 남편이 할 때면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본인은?

결혼하자마자 일 그만뒀던 전과가 있는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일인가 싶은 것이다.

적어도 양심이란 게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나는 그래도 13년 동안 직장인 신분 유지는 해왔다.(고 주장하지만 이제 와 다 무슨 소용인가.)

정작 본인인 결혼과 동시에 국가직을 그만뒀으면서(12년 전 그때는 지금처럼 의원면직이 성했을 때도 아니었고 여전히 공무원은 인기 있는 직업이었다.) 몇 년 간 일해 온 내게, 일도 하고 자식도 둘이나 낳고 살림과 육아까지 거의 도맡아 했던 내게, 백 원짜리 하나 안 벌어 본 사람처럼 대할 때면 어이가 없어진다.

그 사람은 일을 그만두고 그다음엔 어떻게 행동했던가. 우리 집에는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시가에는 휴직을 했다는 거짓말은 본인이 하고, 1년 가까이하라는 공부는 않고 주식에 빠져서(수험생이 주식에 발을 들인 것부터가 나는 이해 불가였다.)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고 합격은 물 건너간 것 같으니 임신이라도 해야겠다고 임신을 하자 나보고 입덧이 심하다고 타박하는 말이나 하고 옆집에서 항의 들어오겠다며 토할 때는 좀 조용히 토하라는 막말을 하고 입덧이 심해 밥 냄새도 못 맡는 내게 도서관에 공부하러 갈 때 도시락을 싸달라고 하고(왜 손수 싸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반찬이 부실하다며 반찬투정을 하고 남들이 볼까 무섭다는 말을 하면서 반찬에 신경 써 달라는 말을 밥도 못 먹고 자다가도 토하는, 입덧이 심한 아내한테 못할 말을 다 하고, 교행직에 합격하자 여전히 입덧 때문에 괴롭지만 꾸역꾸역 출근하는 아내를 혼자 두고 바람 쐰다며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던 결혼 초의 일들이 삽시간에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정작 당사자인 남편은 그 어마어마한 일을 다 잊어버렸단 말인가.

아니면, 잊고 싶은 걸까?


이젠 시간이 많이 지났고 무뎌졌지만, 지금은 나름 평화롭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과거이다.

다 지난 일을 가지고 이제 와서 왈가왈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했던가. 우리 집에도 적용하기 좋은 말이다.(고 나만 혼자 가만히 생각해 본다.)

전과를 잊은 남편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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