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날씨도 꽤 쌀쌀한데 엄마는 무릎도 아프다면서 아직 한 달이나 남은 설을 벌써부터 준비할 각오를 하셨다. 아니, 정확히는 설에 사방에서 몰려드는 아들, 손자, 며느리, 사위를 위한 세뱃돈을 마련하기 위한 각오 말이다.
이렇게나 친정 엄마는 준비성 하나는 철저하시다.
밭에 있는 그 시금치를 팔아 세뱃돈의 종잣돈을 마련하실 계획이 다 있으신 거다, 그래서 시금치가 있다.
이듬해 세뱃돈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 늦가을에 엄마는 밭에 시금치(씨)를 그렇게 뿌리셨나 보다.
작년부터 갑자기 관절염이 심해지고 걷는 게 상당히 불편해진 엄마지만 그동안 농사지어 온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하셨다. 정말 다리를 전다고 생각할 만큼 절뚝이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미련을 못 버리셨다.
병원에서는 가능하면 일을 최대한 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지만 의사 앞에서는 알았다고, 그러겠다고 하면서도 병원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한다.
"촌에서 일 안 하고 어떻게 산다냐? 그래도 하던 것이라 좀 해야제."
라고 말이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자식들이 아무리 일 좀 줄이시라고, 그만하시라고, 다 접어도 되지 않느냐고, 아들 딸 다 결혼했고 두 분이 그냥저냥 생활할 정도는 되는데, 이젠 그렇게 살아도 될 것 같은데 왜 굳이 그렇게 일을 하시냐고 해도 언제나 저렇게 같은 대답뿐이다.
시골에 살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긴, 당장 마당 잔디 사이에 삐죽 솟은 풀 한 포기만 있어도 그 가죽손이 먼저 달려가는 것을, 밭에 씨앗을 뿌려 놓고 날이 가물면 스프링클러라도 돌려야 하는 것을.
"엄마, 요새 날도 춥고 무릎도 안 좋은데 무슨 시금치 작업을 한다고 그러셔?"
"그래도 뿌려 놨는디 그냥 놔두믄 쓰겄냐. 한 푼이라도 해야제."
듣고 보니 또 틀린 말은 아니다.
수확을 하려고 씨를 뿌려놨으니, 다 컸으니까 이제 원래 목적대로 거두어들여야 한다.
지난해 늦가을 부모님 두 분이서 씨앗을 뿌리고 풀을 뽑아가며 가꾼 그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엄마도 이제 곧 일흔, 농사일을 줄여도 될 연세이다.
줄여야만 할 것 같은데 세뱃돈이 올 초부터 엄마를 시금치밭으로 향하게 할 것 같다.
사실 아빠는 절대 시금치 농사는 안 하겠다고 선언하셨는데 엄마가 '시금치 씨만 뿌려 주면 나머지는 혼자 다 알아서 하겠다'고(일단 아빠를 안심시킨 다음에 같이 밭으로 가자고 하신다.) 하시고 같이 씨를 뿌렸고 바야흐로 수확할 때가 된 것이다. 아니, 사실 때가 지나긴 했다.
연일 비가 계속 오고 눈 오는 날이 잦아서 작황이 그리 좋은 편도 못되어 엄마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고 어느 정도는 자포자기하고 있었는데 이것들이(?) 새로 속잎이 솔솔 돋아나자 다시 마음이 동하신 거다.
"엄마, 건질 것도 얼마 없을 것 같은데 그냥 닭이나 해 줍시다."
"그래도 가서 보믄 또 다르다. 저렇게 보여도 좋단 말이다."
라며 애써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셨다.
내 기억으로는 근래에 보기 드물게 작황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았지만, 제초제를 안 하는 대신 아픈 다리로 일일이 풀 뽑아 가며 키운 작물이니 오죽하실까.
"엄마, 돈 벌려고 하다가 돈 더 들어간다니까!"
내가 20년 넘게 하는 말이다.
"다 벌어서 병원 갖다 주면 뭐 해? 그냥 덜 벌고 덜 아프면 되지."
단순한 나는 계산이 지나치다 싶게 정말 단순하다.
물론 덜 일한다고 반드시 덜 아프리란 보장도 없다.
이미 한계치를 넘어버린 것 같다.
게다가 이런 내 말이 엄마에게 통할 리도 없다.
시금치가 자라면 제일 먼저 캐 와서 맛보는 사람이 나면서, 말로만 엄마를 생각해 주는 척하는 거 아닌가도 싶다.
그러니까 내 말은, 부모님 두 분이서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하지만 언제나 그 적정량이 문제다.) 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끔은 너무 힘에 부쳐하면서도, 몸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하면서도 무리를 하시는 통에 말썽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