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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Feb 02. 2024

개학 이브에 짜는 방학 계획표

방해 마지노선 즈음에 하여

2024. 1. 31.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근데 우리 개학이 언제지?"

아드님이 세상 환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우리 아들, 설마 개학날이 언제인지도 모르는 거야?"

정말 나는 다시 한번 느닷없어졌다

불과 개학을 일주일 가량 앞둔 지난주의 일이었다.

아무리 실컷 놀기만 하라고(물론 해야 할 일은 하고) 원 없이 느슨한 생활을 해 보라고 마음껏 자유를 주었더니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물론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다.


어제 드디어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엊그제 밤까지도 남매는 현실을 부정하려 들었다.

"설마, 진짜 방학이 다 끝난 거야?"

볕이 닿으면 쉽사리 산패되어 버리는 참기름도 아닌데 한 달 내내 직사광선을 피해 서늘한 곳에 보관 중이던 가방을 꺼내며 딸이 세상 서러운 얼굴로 말했다.

"근데 정말 너 방학 숙제 없어?"

딸이 자꾸 방학 숙제가 없다고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으나 나는 설마 설마 했다.

숙제 없는 방학이 단 한 차례라도 있었던가,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이래로?

"응... 아마 없을걸?"

아마라니?

방학 첫날부터 내가 여러 번 물어봤지만 딸은 늘 일관된 대답만 해왔다.

"아무것도 없어, 엄마."

"그래도 선생님이 무슨 방학 생활 같은 거 관련해서 아무것도 안 주셨어?"

"그런 거 없다니까."

그래, 네가 없다면 없는 거겠지, 뭐.

그럼 너는 패스!


아들은 당장 다음날이 개학인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최소한 아들은 방학날 종이 몇 장을 챙겨 왔었다.

방학생활 계획표라든지, 안내문, 일일 점검표 비슷한 그런 거 말이다.

아들 가방도 한 달째 직사광선을 피해 서늘한 곳에 얌전히 대기 중이었다.

"우리 아들, 가방이라도 미리 꺼내 놓을까? 인간적으로 필통이라도 넣어 두자."

"왜?"

"혹시 내일이 개학이라는 소문 안 들었어?"

"아,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라, 그래."

잠시 후 아드님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일에 착수하셨다.

방에서 한 달 묵은 가방을 열어 겨울방학 계획표를 꺼내오시는 것이었다.

"자, 이제 내일이 개학이니까, 그럼 계획표를 짜야겠지?"

"우리 아들, 내일이 개학인데 벌써 계획표를 짜려고 그래?"

"그럼. 지금이라도 짜야지."

이렇게 말하며 아들은 세상 단순한 계획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거 너무 이른 거 아닌가.

겨우 개학이 12시간도 안 남았는데, 지금 이걸 하는 의미가 있을까?

있겠지, 최소한.

그때까지는 아직 방학기간 중이었으니까.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30초도 안되어 아들은 계획표를 작성했다.

"어때? 엄마, 이거 정말 필요한 것만 딱 잘 넣었지? 이제 다 됐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고 아들의 방학 계획표도 뭔가 앞뒤가 바뀐 것만 같다.

하긴, 방학 계획표란 자고로 개학 이브에 작성하는 게 정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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