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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y 09. 2024

하얀 러닝 샤쓰의 사나이와 그의 아들

비교체험, 극과 극

< 사진 임자 = 글임자 >


"자, 어머니, 아버지 오늘이 무슨 날이죠?"

"그건 바로 어버이날!"

딸이 선창을 하자 아들이 기계적으로 출동해 주셨다.

음, 뭔가 있긴 있군.

틀림없어.

본능적으로 나는 낌새를 알아차렸고 입이 헤벌죽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딸이랑 아들이 뭘 준비했나 보네?"

전혀 생각도 못했다는 얼굴로, 하지만 이미 다 직감적으로 눈치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게 나는 살짝 호들갑스러워졌다.

그럼 그렇지. 말로는 어버이날이 부담스럽고 어린이도 힘들다고 토로하던 작년의 어버이날이 까마득해진 지 오래, 그래도 그냥 넘기긴 뭔가 아쉽지 않겠느냐고 나만 혼자 생각하고 있었던 차다.

"엄마, 먼저 내가 엄마를 위해서 준비한 곡이야."

아들이 대뜸 피아노 앞에 앉았다.

게다가 악보 비슷한 것까지 챙기고서 말이다.

이 정도까진 바라지도 않았는데, 너무 거창한 거 아니야? 평소에 피아노 치는 남자 한번 만나 보는 게 (물론 지금 이 시점에서는 결코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소원인 나는, 나와 아무 상관없는 드라마나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저만치 앉혀 놓고 아름답게 피아노 연주를 하는 그런 장면을 (이번 생에는 그런 욕심은 요단강을 건넌 지 오래지만) 철없이 많이 꿈꿔 왔던 나는 평소에도 곧잘 이렇게 말하곤 했던 것이다.

"아, 남자친구나 남편이 여자 친구나 아내에게 피아노 연주를 해 준다는 흉흉한 소문을 들었는데 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까? 노래를 불러 주는 남자도 있다던데. 어휴."

라고 살짝 아이들 앞에서 한숨을 쉬며 그 양반을 곁눈질로 슬쩍 흘겨봤음은 물론이다.

"우리 아들은 나중에 여자 친구한테 피아노 연주도 해주고 노래도 불러 주는 거 어때? 엄마한테 누가 그렇게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옛날에 엄마 친구는 결혼식장에서 남편이 노래도 불러 주더라. 정말 보기 좋더라. 우리 아들은 여자 친구를 위해서 혹시 피아노 쳐 줄 생각 없어? 노래까지 해 주면 여자친구가 얼마나 좋아할까? 우리 아들 여자 친구는 좋겠다."

라며 아직 실체도 없는 아들의 여자 친구를 샘내며 옛날 내 친구를 부러워하며, 동시에 그 양반을 원망(?)하며 다시 한번 반대편 얼굴로 우리 집 어떤 성인 남성을 흘겨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엄마, 여자 친구한테 꼭 피아노 쳐 줘야 하는 거 아니잖아."

아들은 단칼에 엄마의 오랜 로망을 산산이 부서뜨렸고 나는 차라리 충격적이었다.

남편에게 못 받은 피아노 연주를 아들을 통해서라도 어떻게 안될까 하는 마음으로 잠시 망상에 빠졌던 나는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그래, 꼭 피아노를 쳐야 하는 건 아니지. 네 말이 맞다. 하기 싫음 그만이지 뭐."

이렇게 쉽게, 그리고 이렇게나 빨리 아들이 엄마의 숙원 사업을 단번에 무산시켜 버리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래도 엄마 말을 참고는 할 수 있지 않아? 남자 친구가 여자 친구한테 피아노 쳐 주면 정말 좋아할 거야. 물론 반대로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를 위해 연주해 줘도 좋겠고."

라고 말하며 딸을 슬며시 쳐다봤지만 딸은 내 말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그동안.

이랬었는데,

그랬는데,

그렇게 무정하게 이 엄마의 바람을 등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들이 피아노 앞으로 가자 나는 그만 감격에 겨워졌다.

"엄마,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야. '이 세상에 좋은 건 모두 주고 싶어'."

아들은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근데 연습을 많이 못했어. 엄마 몰래 연습하려고 했는데 엄마가 집에 있을 때가 많아서 말이야. 그리고 다 외우지는 못했어."

갑자기 고해성사를 하며 아들은 전혀 유창하지 않게 피아노를 연주했다.

"괜찮아, 우리 아들. 엄마를 위해서 이렇게 준비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어쩜 우리 아들이 이런 생각을 다 했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모자간의 대화가 오고 가는데, 이 중요한 순간에 반갑잖은 불청객이 한 명 있었으니,

"밥 아직 다 안 됐나? 반찬만 있고 밥이 없네?"

이 양반아, 사람이 밥만으로 사는 줄 아시나?

그 불청객이 누구인지는 그의 신변보호를 위해 절대 절대 밝힐 수 없다.

아마 여러분은 그가 누구인지 절대 절대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어제도 드레스코드는 하얀 러닝 샤쓰인 사나이였다.

그 하얀 러닝 샤쓰 입은 말 많은 그 사람은 또 한 마디 보태셨다.

"이런 건 밥을 먹으면서 들어야지, 그치, 얘들아?"

눈치도 없이 낄 데 안 낄 데 다 끼는 불청객이라니.

우리 아드님께서 이 엄마를 위해 피아노 연주를 하고 계시는데 말이야.

"그냥 가만히 있어 줄래? 그리고 좀 조용히 좀 해. 우리 아들이 연주하는 거 안 들리잖아!"

나는 기어코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도 위대한 아들의 연주가 끝이 났고 나는 손바닥에 불이 나게 손뼉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너희 엄마 또 오바한다."

그 불청객은 참으로 말이 많았다.

남이사, 오바를 하든 육바를 하든?

하지만 아들의 연주를 듣고 이미 한껏 인심이 넉넉해진 나는 그런 말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에게 칭찬 세례를 했다.

"우리 아들, 세상에 어쩜 이렇게 연주를 잘해? 엄마가 들어 본 피아노 연주 중에 최고야. 우리 아들, 정말 고마워. 엄마를 위해서 이렇게 준비해 주고. 그것도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로. 정말 고마워."

아들을 향한 내 마음은 한 치의 거짓이 없었다.

어쩜, 내가 저런 아들을 낳았다니.

나중에 누가 여자 친구가 될지 참 좋겠다.

누구랑 결혼할지 그 애는 참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또 하얀 러닝 샤쓰의 사나이가 한마디 했다.

"이제 다 끝났으면 밥 먹을까?"

"밥은 무슨 밥이야! 난 밥 안 먹어도 배부른데!"

라고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아들을 추켜 세워줌과 동시에 그 불청객을 차단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물론.


어버이날, 정말 이런 선물,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다.

며칠 전 피아노 건반에 '도, 레, 미'가 붙어 있었을 때만 해도 갑자기 왜 이게 붙어 있나 싶었다.

"누나가 이거 붙여줬어. 그래서 연습했어."

"그랬구나.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거야?"

"한 달 전부터."

"세상에 만상에. 귀찮고 힘들었을 텐데 엄마를 위해서 그동안 몰래 연습한 거야?"

파면 팔 수록 감동적인 이야기가 샘솟듯 나왔다.

이런 화수분이 없다.

남매는 피아노 학원을 다녀 본 적도 없고 따로 배운 적도 없다.

정말, 누가 이런 아들을 낳았냔 말이다.

남편에게 받지 못한 어떤 것을 아들에게서라도 받고 싶은 다소 불순한 동기가 전부터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나를 놀라게 해 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진심으로.

"자, 이젠 내 차례야. 아빠를 위해서 준비했어."

딸이 다음 타자로 나서며 연주를 시작했다.

"이번엔 '아빠 힘내세요'야."

하얀 러닝 샤쓰의 사나이도 이번만큼은 초집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내 아이들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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