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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un 21. 2024

2024년 6월, 그놈들이 온다

콩밭의 빌런들

2024. 6. 19.

< 사진 임자 = 글임자 >


"요새 아빠랑 나는 날마다 밭에 가서 앉아 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제 더워서 못 살겄다."


어느 날 엄마는 이런 비보를 내게 들려주셨다.

그때가 아침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그렇게 이른 아침부터 도대체 밭에는 왜?


뉴스에서도 66년 만에 가장 더운 6월이라고 했던가?

나도 이렇게 더운 6월은 처음이었다.

단지 나이를 먹어가서 더위에 더 취약해지는 것이 아니었던 거다.

그런데, 그나마 거의 30년도 더 젊은 나도 이렇게 힘든데, 밭이 아니라 그늘진 집안에서도 이것저것 한다고 움직이면 땀이 나는데 칠순이 넘은 부모님은 오죽하랴.

그나저나 밭에는 왜 매일 가신다는 걸까?

"엄마, 날도 더운데 밭에는 왜 가셔?"

"요새 그놈들이 날마다 온단 말이다."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그놈들이 그놈들이제 누구겄냐?"

지금 칠순의 엄마가 마흔도 넘은 딸에게 느닷없이 스무고개를 하자는 건가?

이렇게나 뜬금없이?

엄마가 다짜고짜 그놈들이라고 칭하는 걸 보면 보통 놈들은 아니다.

"밭에 어떤 놈들이 온다고 그래?"

"그놈들 있다, 날마다 와서 우리 콩 밭에서 콩 따먹는 놈들."

아, 그놈들이 바로 그놈들이었구나.

그분들이 아니라, 그놈들은 정말 '그놈들'이라고 칭해야 마땅하다고 나도 격하게 동의했다.

"그놈들이 또 왔어. 날마다 와서 못 살겄다. 날도 더운디 힘들어서 밭에 지키고 앉아 있지도 못하겄다. 아빠랑 나랑 반씩 나눠서 요새 날마다 보초 선다."

아, 그러니까 그놈을 때문에 그런 거였구나.

공평하게 오전에는 아빠가 보초 서고, 오후에는 엄마가 보초를 선다고 했다.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교대 근무'라고 한다지 아마?

"아빠는 더워서 못하겄다고 조금만 하다 집에 와버렸다. 그놈들 때문에 내가 못살겄다. 사람이 쫓아도 도망도 안 간단다."

엄마는 꼬박 반나절을 근무(?)했는데 아빠는 고작 한두 시간만 지키고 있다가 포기하고

컴백홈 하셨다고 엄마는 또 내게 전화하셨다.

"엄마, 날도 더운데 어떻게 그렇게 맨날 지키고 있어? 그놈들이 그렇게 콩을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놈들이 막 콩이 돋을 때 와갖고 쏙쏙 다 뜯어먹는단 말이다. 한두 놈들도 아니고 떼로 와갖고. 사람이 안 지키고 있으믄 하나도 안 남아나."

"그냥 허수아비나 그런 거 세워 두면 안 돼? 더운데 어떻게 날마다 나가?"

"우산 쓰고 앉아 있제. 그래도 덥더라."

"하루 이틀도 아니고 힘들어서 어떻게 그렇게 해?"

"그래도 며칠만 더 보초 서면 돼. 좀 크믄 또 먹으러 안 온단 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는 내게 그놈들이 얼마나 '파렴치한 놈들'인지, 얼마나 얌체 같은지 그 실체를 보고하셨다.

설마, 나보고 하루 보초라도 서라는 건가?

생각만 해도 나는 탈진할 것만 같았다.

나는 여름에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사람이다.

"근데 엄마 어떤 새가 그래? 참새야?"

평소에 나는 참새의 만행을 수 백 가지는 알고 있고, 목격도 했다.

"참새는 안 먹어. 비둘기 같은 것들이 먹제. 요새 먹을 것이 없어서 우리 밭에 날마다 와서 그놈들만 좋은 일 났다."

그러니까 그놈들의 정체는 바로 새였다, 비둘기를 닮은.

최근에 친정에 가서 나는 기어이 콩밭에 파견되고야 말았다.

"콩밭에 한 번 가 봐라. 또 그놈들 왔는가 모르겄다. 왔으믄 쫓아라."

내가 이 나이에 콩밭에 새나 쫓으로 가야 하나?

나는 양심도 없이 인간이 힘들게 심어 놓은 콩밭에서 무임승차하는 그놈들을 응징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콩밭으로 출동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석양 무렵이라 그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 무리의 참새떼가 푸드덕 날아오를 뿐이었다. 괜히 고놈들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놈들 보고 놀란 가슴, 고놈들도 보고 놀란다고나 할까.

그놈들은 일찌감치 그날의 콩밭 서리를 다 마친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정말 콩이 막 돋았을 때 윗부분만 똑 떼어먹은 흔적이 역력했다.

이런 양심도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밭에는 어디서 많이 보던 의자가 있었다.

웬 의자인가 했더니 그놈들을 감시하기 위한 의자였다.

역시 콩밭에는 핫핑크지.

아이들이 어릴 때 쓰던 건데, 어른이 오랫동안 앉아 있기엔 불편할 텐데, 그렇다고 거실의 안마의자를 밭으로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 없어."

"그래? 내일 아침에 또 가서 앉아 있어야 쓰겄다."

콩 농사도 절대 쉬운 게 아니구나.

농사가 쉬운 일 하나 없구나, 이렇게.


새야 새야, 녹두밭에도 앉지 말고 우리 부모님 콩밭에도 앉지 마라.

제발~

그리고,

경고야!

자꾸 그렇게 우리 콩 다 먹어버리면 그땐 정말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말도 안 통하는 조류에게 무슨 해괴망측한 경고란 말인가.

다만, 나는 소망한다, 적어도 그놈들이 일말의 양심을 갖추기를.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양심은 무슨 양심, 그러니까 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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