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에도 결정적 시기가 있다.
< 사진 임자 = 글임자 >
"합격아 , 이거 봐봐. 엊그제 보고 온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커버렸어."
"진짜 크다. 근데 엄마, 이게 뭐야?"
"뭔지 모르겠어?"
"응, 뭔데 이렇게 커?"
"애호박이야. 진짜 크지?"
"무슨 애호박이 이렇게 생겼어? 이런 건 처음 봐."
"그러게. 제때 안 땄더니 이렇게 커버렸네. 외할머니한테 그때 분명히 따라고 말했는데 깜빡하셨나 봐."
딸은 적잖이 충격받은 눈치였다.
작년에도 이미 겪은 일이다.
하루가 다르게 길어지고 통통해지는 애호박들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절대, 결코, 다시는 애호박이 나이들 때까지 방치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텃밭은 내 텃밭이 아니라 부모님의 소유였고,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니 마음만은 항상 친정 텃밭에 가 있었지만 매일 들락날락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 폐백식을 할 때 대추만 그리 던져주는 걸까?
완두콩에 파묻힐 때는, 봄에는 완두콩으로 대체해도 괜찮을 일이라고, 여름엔 애호박을 실컷 던져 줘도 좋을 일이라고 혼자서만 생각했던 것이다.
애호박이 얼마나 한꺼번에 주렁주렁 열려 버리는지 정말 주체하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작년에 난생처음 애호박을 심었던 친정 부모님도 그 정도까지 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셨다.
다른 농산물처럼 하루 이틀 더 지나도 별일 없겠거니, 오히려 날짜가 갈수록 더 커지고 맛있어질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왕이면 크게 커야 먹을 게 더 많아지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건 정말 오산이었다는 걸 애호박은 저런 방법으로 증명해 주었다.
시장에서 쉽게 보는 크기 정도로 자랐을 때 따지 않은 점점 애호박은 씨가 여물고 속살을 단단해졌고 씨 때문에 별로 건질 것도 없었던 것이다. 어리석은 중생이 자꾸만 더 커지기를 욕심 낸 과보는 질긴 호박으로 돌아왔다.
크다고 무조건 좋기만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아, 그래서 애호박이었던 거야.
적당히 연할 때, 하루라도 어릴 때 따 먹는 호박이라서 말이다.
늙어가는 그것을 다섯 개나 따서 딸에게 주었더니 두 손으로 들기도 무거워 자꾸만 떨어뜨렸다.
때를 놓치면 가끔 이렇게 되는 법이다.
사람에게도 결정적인 순간이 있듯 애호박에게도 따줘야 하는 결정적인 시기가 있었음을 나는 몰랐던 거다.
조금만 더 컸으면, 하루만 더 키워서 먹었으면 했다가 오늘날 저런 대형 애호박을 땄다.
유전자 조작을 한 것도 아니고 성장 촉진제를 맞힌 것도 아닌데 저렇게까지 클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설마 설마 했지만, 역시나 보나 마나였다.
나는 또 깨닫게 된 것이다.
애호박은 인간이 따주기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다.
야속한 것은 세월만이 아니었다.
세월도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데 애호박이라고 별 수가 있었겠나.
안 따주니까 마구마구 커져버린 것이다.
애호박이 아니라 점점, 어쩌면 나이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로소 나는 '애늙은이'라는 말의 어원을 밝혀낸 것 같다.(고 말도 안 되는 말을 그냥 같다 붙인다.)
애호박이 늙어서 저런 형상을 갖추게 된 바, 그래서 애 늙은 호박이 된 게 아닐까?
전혀 얼토당토않고 혼자만 의심하는 그것을 뒷받침해 줄 만한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가 나이 먹고 더 나이 먹으면 결국 늙게 되는 것이니까, 애늙은이 호박은 결국에는 애늙은이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나는 다시금 다짐한다.
애호박은 늙어갈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