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날마다 그놈들 때문에 못살겄다. 하루 종일 사람이 지키고 서 있어도 와서 콩을 다 따먹고 간단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엄마는 내게 저렇게 하소연하셨었다.
"그놈들이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애타는 엄마 마음도 모르고 속없이 나는 그런 소리까지 다 했었다.
"그놈들이 한 둘이 오는 줄 아냐? 하나가 와서 맛보믄 다른 것들도 다 불러서 떼로 온단 말이다."
여왕개미를 따르는 개미들도 아니고 처음에는 한 두 마리로 시작한 콩밭 서리에 그놈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건 시간문제라고 했다. 새들은 아이큐는 별로 높지 않지만(풍문으로 들었다.) 단합은 무척 잘 되는 모양이다. 생존본능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일 텐데 아이큐 어쩌고 하는 것도 안 맞는 말 같긴 하다. 하지만 나는 이쯤에서 유치하게 조류의 아이큐에 대해 굳이 언급함으로써 그들에 대해 험담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콩밭이 그 무리의 희생양이 된 건 처음 콩을 심고 난 후 삐쭉빼쭉 콩 대가리가 땅을 뚫고 나오면서부터였다. 시도 때도 없이 새떼들이 날아들어 갓 돋아난 콩을 얌체같이 먹어버리는 바람에 매일 엄마 아빠가 오전, 오후 조로 나누어 교대근무를 서고 계신다고 했다. 이제 그 밭의 콩들은 떡잎 위로 제법 잎들이 늘어났고 더 이상 새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가만 보니 새들은 막 땅으로 돋아난 그 콩대가리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부모님은 '또' 다른 밭에 콩을 심으셨다고 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콩심기,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일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결국 그리 하셨던 거다.
그래서 나는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 없다는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디.
콩을 심었으니 새떼들의 콩밭 서리를 감수해야만 하리.
1차 새떼 물리치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콩밭의 서리꾼 물리치기 시즌2'가 막 시작된 것이다.
"엄마, 저번에 심은 콩도 많은데 또 심었어? 또 날마다 가서 지키고 있게? 날도 더운데?"
"그래도 또 심어야제."
이 더운 여름날에 두 분이 그렇게 콩밭에서 보초 서느라 고생하시면서 도대체 왜 또 두 번째 화살까지 굳이 맞으려고 하시는지 나는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수 십 년 간 농사를 지어 오신 분들은 빈 땅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법,
"땅을 비워놓으면 풀만 자란다."
라는 두 분의 신조 내지는 농부로서의 마땅한 의무 때문에 '땅을 놀릴 수는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렇게 시즌 2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내게 전화하신 것이다.
"이놈들, 인자 꽹과리 소리 듣고 깜짝 놀라서 다 도망간다. 속이 다 시원하다."
꽹과리라니? 난데없이 무슨 꽹과리란 말인가.
"그게 무슨 말이요? 꽹과리를 어디다 써? 어디서 났소?"
엄마의 갑작스러운 '꽹밍아웃'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우리 밭 아래 그 집에서 빌려 주더라. 꽹과리 치믄 새들이 안 온다고 갖다 쓰라고 주더라."
그런 일급비밀을, 그렇게나 대단한 영업비밀을 누설해 준 그분께 절이라도 하고 싶은 말투였다.
"그래? 진짜 꽹과리 치면 새가 안 와?"
"안오제. 그놈들이 밭에 앉을라고 하믄 내가 꽹과리 쳐서 쫓아낸다."
엄마는 이제 꽹과리를 치는 당신을 자랑스러워하시는 것 같았다.(고 나는 진심으로 느꼈다.)
"신기하네. 진짜로 안 와?"
"안 와. 시끄러워서 깜짝 놀라서 도망가더라. 그놈들 인자 우리 콩은 다 먹었다."
엄마가 새들로부터 콩싹을 지켜낸 것은 과연 괄목할 만한 성과였으나 '서리꾼들'에겐 다소 너무 야박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고로 콩밭은 서리하는 맛으로 다니는 놈들일 텐데.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과연 나는 엄마 편인가? 서리꾼들 편인가?
그만 나는 그 서리꾼들이 안쓰러워졌다.
그동안 편하게 놀고먹은(분명히 편하게 놀고먹었음에 틀림없다.) 그놈들이 안돼 보이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