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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Oct 01. 2024

상위 2%의 삶

단지 걷기만 했을 뿐인데

2024. 9. 26.

< 사진 임자 = 글임자 >


19,772

학창 시절 전국 등수도 아니고, 하루 칼로리 소비량도 아니다.

올해 6월 언젠가 하루 종일 걸었던 내 걸음의 수다.

그렇게 난 어느 순간 상위 2%가 되었다.


전체 평균은 6,426이었고 40대 여성 평균은 5,969였다.

그런데 나는 40대 여성 평균의 3배도 넘게 걸었다.

살짝 아쉬움도 남았다.

조금만 더 걸었더라면 2만보까지 가능했을 텐데.

그 걸음 수가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숫자에 매달리는지, 2만보에서 조금 모자란 숫자를 보며 혼자만 아쉬워했다.

언제였던가.

한 사이트에서 매일 6 천보 걷기 챌린지를 시작했다.

챌린지라니까 덜컥 도전하고 봤다.

걷는 건 그나마 자신 있었으니까.

마라톤도 아니고 속보도 아니고 그냥 하루에 6 천보 정도만 걸으면 목표 달성을 하는 셈이라니까 어차피 잠시도 가만히 안 있는 성격이니 한번 해봄직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두 다리가 성할 때 조금이라도 더 걷고 움직여서 노후를 대비(?)해야겠다고 마침 다짐했던 터라 나는 그 챌린지를 시작한 후 일종의 의무감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몇 분 걷고 걸음수를 확인하고 또 몇 발짝 떼고 확인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걸음수에 연연하게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보통 휴대폰은 한 장소에 두고 집안일을 하는 편인데 매일 일정량의 걸음을 걸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휴대폰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종종 애꿎은 그것을 흔들어 보며 걸음 수가 올라가나 안 올라가나 유치한 실험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얘들아, 오늘 엄마가 만보 걸었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매일매일 얼마나 내가 성실하게 그 챌린지에 임하고 있는지를 굳이 알려 가면서까지 말이다.

그렇게 매일 걷는 일이 정말 '일'이 되어 버리자 오히려 그 일이 또 시들해져 버렸다.

그래, 건강도 챙기고 목표 달성도 하고, 이거 완전 일석이조잖아! 게다가 그 목적을 달성하면 뭔가(?)가 있다고 해서, 사실 거기에 혹해서 시작한 일이긴 하다마는. 이렇게나 유혹에 약해빠진 인간이라니.

처음엔 건강을 생각해서 도전해 보겠다고 한 것이 나중엔 마치 매일 끝내야 하는 숙제처럼 느껴지니까 그렇게 따분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언제부터 걸음 수 같은 거 신경 쓰고 걸어 다녔다고.

그거 숫자 좀 올라가면 뭐 한다고.


한참 만에야 어리석은 중생은 불현듯 깨달았다.

달성할 걸음 수가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온종일 한 생각만 하면서 걸어 다니다가 문득 오늘은 얼마나 걸었나 또 그것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 재미가 없어지고 사사로이 감상하던 산책길 풍경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자 비로소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됐다.

이런 상위 2%는 굳이 필요 없겠어.

하위 2% 이더라도 그냥 불순한 동기 없이 마음 편히 걷는 것, 그게 더 건강에는 이롭겠어.

매일 만보를 걸으면 어떠하며 달랑 천보를 걸으면 어떠한가.

아직은 멀쩡한 두 다리가 있다는 사실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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