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가 온다
<사진 임자 = 글임자>
"여름 방학 때 OO이 집에 데리고 온다고 하더라. 아이고..."
엄마의 한숨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진심으로 우러나온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내 눈에는.
덩달아 나도 심란해졌다.
"방학 때 혼자 집에 못 두니까 할아버지 집에서 한 달 있으라고 하더라."
하루도 아니고, 일주일도 아니고, 한 달씩이나?
물론 말이 한 달이지 설마 그렇게 여름 방학 내내 동생이 부모님께 아들을 맡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믿어야 한다.)
"누나, OO이 보낼 테니까 한 번씩 봐줘."
동생은 실실 웃으며 내게 말했었다.
"우리 애들 둘 데리고 있기도 힘들다."
나는 단박에 대답했다.
물론 평생 데리고 살라는 것도 아니고 시간 되면 가끔 조카 좀 봐달라는 의미로 한 말이지만 나는 진심으로 심란했다.
이미 예전 겨울 방학 때 겪은 일이 있었다.
그때는 어린이집 방학이라 오래 있지는 않았고 친정에 조카가 일주일 정도 머물렀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조카는 올해 이제 어엿한 의무교육을 시작하는 나이가 되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초등학생이 되었다.
난 두 아이들의 여름방학만 생각해도 마음이 무거워지는데 조카라니?
물론 우리 집으로 데려 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 댁에 데리고 오겠다는 거였지만 거기엔 이 고모가 은연중에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고모, 나 고모 집에 또 오고 싶어."
예전에 그 조카가 우리 집에서 신나게 놀고 온 집을 헤집어 놓고 떠나며 내게 남긴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절집은 아니지만 '오는 사람 아니 막고, 가는 사람 아니 붙잡는' 우리 집에 또 재방문 의사를 비치셨다, 조카님이.
"고모, 나 고모 집에서 자고 가고 싶어."
내지는,
"고모, 나 내일 또 올래."
라는 말로 얼마나 나를 가슴 철렁하게 했던가.
내 조카니 귀엽고 사랑스러운 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아이는 고모의 건강상태나 사촌 형과 누나들의 체력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순진한 어린이다.
하루 정도야 정신 빼놓고 놀아주고 어느 정도 맞춰줄 수야 있지만...
그날의 격정스러운 상황이 다시 연출된다고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나는 그만 아찔하였다.
"그래. 그럼 다음에 또 와."
(그렇다고 당장 이렇게 또 오겠다고 할 줄을 몰랐다, 얘야.)
라고 당시 순간만 모면하고자 백지수표를 남발해 버린 과보를 이렇게 받는 것이다.
조카는 기억력이 상당히 좋았다.
"고모, 고모가 저번에 고모 집에 오라고 했는데 언제 가요?"
작년에 친정에 갔을 때 나를 본 조카가 물었다.
나는 건성으로 말하고 잊어버렸지만 조카는 다시 우리 집에 올 날만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다음에. 다음에 방학하면 오면 되지. 그러면 형도 있고 누나도 있으니까."
또 그렇게 은근슬쩍 다음 기회로 미루었던 일을 드디어 치러야만 하는지도 모르겠다.
"엄마, 날도 덥고 몸도 안 좋은데 어떻게 데리고 있으려고 그래?"
진심으로 나는 심란했다.
"나도 걱정이다."
엄마는 얼굴이 조금 어두워지셨다.
손주는 무조건 할머니 할아버지가 반길 거라는 착각, 그게 크나큰 오산이었음을 내가 깨달은 건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내 아이들이 어릴 때 나도 주말에 쉬고 싶어 은근슬쩍 외가에 한 번씩 보내고 자유를 만끽했던 철없던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까지 든다, 이제야. 물론 부모님이 자꾸 아이들 데려오라고 데려오라고 전화하셔서 그러긴 했지만 기회는 이때다 하고 거절하지 않았던 나를 반성한다. 맞벌이였던 옛날, 두 아이들 모두 몇 년간 키워주신 정이 각별해서 그러시나 보다 하고 합리화하면서 전화가 오기 무섭게 친정으로 데리고 가곤 했었다, 얌체같이.
"엄마, OO이 언제쯤이나 온다고 했어?"
"모르겠다."
"데리고 있을 수 있겠수?"
"데리고 있으라니까 그래야제 어쩌겄냐?"
"엄마 혼자 계속 데리고 있으려면 힘들 텐데?"
그렇다고 해서
"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다 봐줄게!"
라는 호언장담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았다 물론.
나는 당장 내 자식들의 방학이 두렵다.
내 몸하나 건사하는 것도 일이다.
얼마 전부터 또 몸이 좋지 않아 병원 다니는 중이라 조카가 그렇게 반가울 것 같지도 않다.
(부디 이 글이 남동생 내외에게 발각되지 않기를.)
"OO이 외할머니 집에도 좀 가있으면 좋겠구만 고놈이 할머니집이 더 좋다고 그랬다고 안 하냐."
이걸 좋아해야 하나, 어째야 하나.
"외가에 2주 정도 있고, 여기에 2주 정도 있음 쓰겄구만..."
엄마의 속마음은 그것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라도 사돈과 반반(?) 손주육아를 바라는 지도.
정말 맞벌이 부부에겐, 아니 사돈과 이하 관련 친척들 모두에게 방학은 쉽지 않은 문제다.
왕년에 맞벌이하며 미친 듯이 정신없이 살던 시절을 떠올리면 동생 내외가 안쓰럽고 조카도 기꺼이 즐겁게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내게도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으니 마냥 좋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나저나, 이제 며칠 정도 남았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