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좀 모르면 어때요
<사진 임자 = 글임자>
"오늘 오빠가 합격이 키즈카페 데리고 간다고 하더라.
나름 민원실에서 성실히 대민 봉사를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가 또 속보를 알려 오셨다.
평소에 둘째 오빠는 어린 내 딸을 데리고 5일장도 데리고 다니고 까까를 사 주러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이번엔 키즈카페인가 보았다.
난생처음 가 보는 곳일 텐데, 엄마 아빠도 없이 그 어린것이 잘 다녀 올 수나 있으려나 잠시 노파심이 드려는 찰나, 엄마는 한마디를 보태셨다.
"여자 친구랑 같이 간단다."
"여자 친구랑 같이 간다고? 그냥 둘이 놀지 왜 합격이는 데려간다고 그래?"
보통 사귀는 사이에는 둘이 만나서 놀지 않나?
남의 조카를 굳이 데리고 나갈 필요가 있을까?
둘이 만나는 게 어색한 시기도 다 지났을 텐데(이미 그때는 둘째 오빠와 여자친구가 결혼 얘기까지 다 오간 사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어린것을 데리고 나가서 어떻게 감당하려고? 겨우 두 살밖에 안된 아기인데 벌써부터(?) 키즈카페를 데리고 가겠다고? 아직 우리도 안 데려가 본 데를?(당시 나는 키즈 카페는 최대한 늦게 데려가고 싶었고, 할 수만 있다면 아예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내 허락(?)도 없이 거길 가겠다고? 딸의 엄마는 나니까 우선 나의 양해를 구해야 하는 거 아닌가? 두 살일 뿐이었던 당시의 내 딸은 내겐 여전히 어린 아기였다. 그런 데 데리고 가기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오빠가 좋은 뜻에서 재미있게 놀아 주려고 데리고 가겠다고 한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낯선 곳에 낯선 사람(=둘째 오빠의 여자친구)과 함께 하는 게 딸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일 아닐까?(라고 혼자만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다.)
딱히 낯가림이 심하다거나 유난스러운 성격은 아닌 딸이긴 했지만 그래도 엄마 마음은 또 그게 아니었다.
신기한 물건, 난생처음 보는 장난감, 신세계로의 초대, 딸 입장에서는 눈이 휘둥그레 해질 만한 곳이 될 것이었다.
그나저나 가만,
난 오빠의 여자 친구 이름도 모르잖아?
이름은커녕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걸?
그런데 내일모레 결혼을 한다고?
그래도 최소한 얼굴 한 번 정도는 서로 봐야 하는 거 아닌가?(아니, 내가 뭐라고?)
당시 나는 이미 결혼해서 친정과 거리가 좀 있는 곳에 살았고 둘째 오빠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내 딸은 내가 3개월의 출산휴가와 6개월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을 해서 친정에서 돌봐주고 계셨다. 딸은 제 부모보다 둘째 외삼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외삼촌 데이트 하는데 자꾸 끼면 안 될 텐데. 물론 고작 두 살인 아기가 그런 생각을 할 리는 없겠지만 자꾸 외삼촌의 데이트에 한 자리 차지하는 게 살짝 걱정스럽기도 했다.
만에 하나 밖에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갑자기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아직 아기도 키워 본 적 없는 커플이 뭘 알아서 할 수나 있으려나?
아무리 따로 살고 있긴 해도 딸의 부모인 내가 둘째 오빠보다는 딸을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갑작스러운 돌발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그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오빠, 오빠 데이트 할 때는 오빠 혼자만 가. 왜 자꾸 합격이를 데리고 가려고 해? 그냥 둘이서만 놀면 되잖아. 애는 좀 가만히 둬!"
라고 인정사정없이 말할 수는 없었다.
오빠의 순수한 의도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나마 둘째 외삼촌 덕에 바깥세상 구경도 하고 엄마 아빠는 절대 안 사주는 맛난 '까까'도 선뜻 사주는데 딸도 안 따라나설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맨날 시골에서 소 밥 주는 거나 구경하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따라다니며 밭에서 풀을 뽑는 시늉을 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그런데 가만,
내가 오빠 여자 친구를 정식으로 소개받았던가?
또 느닷없는 그 생각이 났다.
자꾸 그 생각이 들자 내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봤다.
내가 결혼 전에 시가 식구들에게 인사를 하러 갔었던가?
시부모님은 인사차 한 번 뵀었고, 다른 형제자매들은 기억이 없긴 했다.
나도 안 했네.
상견례하는 날 시부모님과 둘째 시누이 내외만 같이 만났었지, 시동생은 한번 본 기억이 있고, 큰 시누이는 얼굴도 모르고 결혼했었네.
맞네, 나도 그랬었네.
사람이 이렇게 자기중심적이다.
하긴 오빠의 여자친구가 (비록 결혼하기로 했지만) 앞으로 정말 결혼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마당에 미래의 시누이(가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를 해야 할 의무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오빠는 키즈 카페에서 신나게 놀고, 맛난 까까를 먹는 딸의 사진을 여러 장 보내왔다.
그 와중에 자신의 여자친구 모습은 머리카락 한 올도 허용하지 않는 센스라니!
실수로라도 사진에 찍혀 백만분의 일이라도 오빠의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재주도 좋게 오빠는 딱 내 딸의 모습만 사진에 담아 보내왔다.
그럴수록 나는 오빠의 그녀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끝내 나는 그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둘째 오빠는 종종 내 딸을 데리고 여자 친구와 데이트했던 것 같았다.
일일이 그때마다 내게 말하진 않았지만 가까운 거리를 갈 때는(오빠의 여자 친구는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았고 거리상 가까웠으므로 종종 셋이 만났던 것 같다.)
하긴 결혼할 당사자인 오빠가 이름 알고 얼굴 알면 되는 거지.
결국에는 결혼식날은 얼굴을 보겠지 뭐.
그러나,
둘째 오빠 결혼식에 나는 가지 않았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