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전화로?
< 사진 임자 = 글임자 >
"전화하라고 하니까 했냐?"
"아직."
"하라고 하니까 왜 안 했냐?"
"할게."
"얼른 해라."
"알았어."
도대체 친정엄마는 왜 그렇게 전화하라고 성화실까?
쑥스럽게시리.
"오늘이 큰 새언니 생일이다. 아냐?"
"아니. "
"생일 축하한다고 전화라도 해 줘라."
"무슨 전화를 해?"
"시누이라고 하나 있는 것이 전화도 안 할래?"
"오빠랑 애들 있잖아."
"거기는 거기고, 너는 다르제."
"뭣이 다르다고 그러요?"
"오빠랑 시누이랑 같냐?"
안 되지. 큰일나지. 오빠랑 시누이랑 같으면 큰일나지.
"알았어, 알았어. 할게."
"생각날 때 얼른 해라. 너는 하도 까마귀 고기를 잘 먹으니까."
"이따가 할게."
"지금 해라. 너 나중에 분명히 잊어버린다."
어떻게 아셨지?
나는 깜빡해 버릴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자꾸 재촉을 하시는 거다.
그런데 가만,
내가 새언니 생일축하 전화까지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미 오빠랑 세 아들들한테 실컷 축하받지 않았을까?
나만 빼고 다들 올케 생일을 챙기나?
남들은 그렇게 하고 사나?
물론 축하해 주면 좋긴 하겠지만 엄마가 내게 너무 강요하다시피 하셨다는 게 문제다.
생일을 알면 축하해 줄 수도 있고 모르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거고 그런 거 아닌가?
시가 사람들이 너무 그러면 며느리 입장에서 좀 부담스럽진 않을까?
엄마가 그렇게 계속 줄기차게 요구하지 않으셔도 생일도 알게 됐겠다, 겸사겸사 안부 전화라도 하면 되겠다 싶었다. 다만 바로 (살짝 쑥스러우니) 엄마 앞에서 당장이 아니라, 나도 하고 싶었던 말들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당신의 큰며느리에게 생일 축하 전화를 '행여라도' 까마귀 고기를 맛있게 먹고 안 할까 봐 노심초사였다.
"엄마, 언니한테 축하 전화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지 왜 그러셔?"
"그래도 이왕이믄 시누이가 전화해 주믄 좋제."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렇게 시작되었다, 올케들의 생일에(물론 내가 깜빡하지 않고 기억하는 해에만) 전화라든지 문자를 하게 된 것은.
엄마는 아들, 손주들(친손주+외손주)과 며느리, 사위 생일까지 꿰뚫고 계신다.
뿐이랴, 동네 어느 집 제사며 시제, 그 집 식구들 생일도 어느 정도 알고 계신다.
"이번 주 토요일이 그 집 제사다."
라든가
"내일모레 그 집 양반 생일이다."
라는 말을 한 번씩 할 때마다 나는 엄마의 기억력에 감탄하곤 한다.
그러니 큰며느리의 여동생 생일을 아는 것쯤은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다.
"큰 새언니 동생 생일이 언젠지 아냐?"
"내가 어떻게 언니 동생 생일까지 알아?"
"언니랑 하루 차이밖에 안 난다고 하더라."
이런! 알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군.
"엄마는 그것까지 다 알아?"
그러자 엄마는 갑자기 우리 집과 관련된 사람들의 생일을 줄줄 읊기 시작하셨다.
그것도 음력과 양력으로 구분해 가면서 말이다. 가끔씩 엄마의 시누이와 그 많은 시동생들 생일까지 막힘이 없으시다.
친정 쪽은 대개 음력으로 생일을 쇠니까 매년 날짜가 달라지는 반면 며느리들과 손주들은 양력으로만 쇠니까 그 날짜를 기억하는 것은 엄마 입장에서는 일도 아닐 것이다.
"너 낳았을 때 눈이 얼마나 왔는지 아냐?"
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하지 때 우리 OO이 생일이고, 9월에 OO이 생일이고, 좀 있으믄 OO생일..."
"엄마는 그 많은 생일을 어떻게 다 기억해?"
"이까짓 것도 기억 못하믄 쓰겄냐?"
어마? 그럼 난 못쓰겄네?
"그래도 사람이 몇이요? 제사도 있고 시제도 있고 큰집, 작은집 제사랑 동네 사람들 생일이랑 제사도 다 알더구만."
정말 놀라운 기억력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내 생일도 어쩔 땐 깜빡하고 지나간다.
어느 해였던가.
"어제가 니 생일이었는디 미역국이라도 먹었냐?"
"어? 그랬어?"
"이것아, 너는 니 생일도 모르냐?"
화들짝 놀라 음력 날짜를 따져보니 엄마 말이 맞았다.
이렇게 음력으로 못 찾은 생일은 양력으로라도 기필코 찾는다.
물론 이것도 양력이 더 뒤에 있을 때만 가능하지만 말이다.
며느리 생일이면 엄마는 며느리에게 항상 전화를 하신다.
그리고 어쩌다 그녀들이 시가에 온 시점이 생일 근처면 미리 축하하며 며느리에게 반드시 생일축하금도 주신다. 내가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이건 손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어쩔 땐 나를 통해 대신 보내시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다가 언제가 느닷없이 나의 시어머니 생각이 났다.
시어머니에게는 전혀 그런 면은 없다.
손주나 며느리는 둘째치고 당신의 아들 생일에도 전화 한 번 하신 적이 없다.
작년에 당신 아들 생일에 내가 전화를 했었다.
"어, 그러냐? 나는 몰랐다."
그게 서운하다거나 한 것은 절대 아니다, 물론.
낳아주신 것만도 어딘데 전화까지 바라랴?
나도 시어머니가 친정엄마처럼 우리에게 해 주시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한 번 정도는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 엄마는 딸과 외손주들은 기본이고 사위 생일까지 항상 다 챙겨주고, 맛있는 음식 해서 주라고 매번 거금도 나한테 주시는데(물론 사이가 안 좋을 때는 나 혼자 실컷 과자 사 먹고 입을 싹 씻은 해도 있긴 있었지마는 그건 순전히 사위가 지은 업에 대한 과보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만 싶다.) 한 번 정도는 친손주들 생일을 기억해 주실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이렇게 친정엄마와 시어머니는 정반대다.
시어머니는 무던한 성격이라 모든 일을 다 챙기고 일일이 참견하거나 간섭하지도 않으시고(며느리 입장에서는 대단한 장점이다.) 생일이라고 해서 크게 신경을 쓰시는 분도 아닌 것 같았다. 하긴 나도 그건 마찬가지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이런 것을 악착같이 챙기는 성격도 아니라 결혼한 지 15년이 되어가도록 한 번도 결혼기념일을 챙겨 본 역사가 없다.
엄마는 엄마고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다.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바랄 일도 아니긴 하다.
그건 어디까지나 시어머니의 영역이다.
그리고 생일 관련 일 말고는 나를 얼마나 챙겨 주시는데 생일 축하 전화 한 번 안 받아봤다고 서운해할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너무 과하게 생일을 챙기는 친정엄마보다 차라리 평소처럼 아무 연락이 없으신 시어머니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두 오빠와 남동생이 결혼해서 현재 내겐 올케가 셋이다.
올케들 생일만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데 조카들이 태어나니 이젠 엄마는 당신의 친손주들 생일까지 은근슬쩍 내게 알려주기 시작하셨다.
"내일모레 우리 OO이 생일이다."
그 소리를 듣고 이 고모는 당장 조카에게 축하 연락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올케들에게는 좀 쑥스럽지만 조카들이라면 말이 또 달라진다.
도대체 엄마는 왜 그렇게 며느리들 생일을 챙기시는 걸까?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
굳이 왜 나까지 가세하게 하시는 걸까?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오빠들이나 남동생 생일에는 그런 말씀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아들들 생일이라고 딸보고 축하 전화하라고 등 떠미는 행동 같은 건 말이다.
그런데 며느리들 생일만큼은 어떻게든지 챙기시는 것 같다.
그러다 불현듯 '생일'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태어났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당신의 아들들과 각각의 며느님들이.
유레카!
그거였군!
며느리들이 안 태어났으면 아들들과 결혼 안 했을 거고, 그럼 그 세 아들은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잖아?
그나마 며느리 덕분에 아들이 지금 잘 살고 있는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닐까?
나 혼자만 북치고 장구친다.
하긴 분명히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
"지금 그 며느리들 아니었어도 다른 더 좋은 며느리를 만났을 수도 있지 않은가?"
라고 말이다.
더 좋은 며느리는 아마 없는 것 같다.
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리란 보장도 없는 것 아닌가?
지금 엄마의 세 며느리가 제일인 것 같다.
지금이 최고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이 최고인 거다.
나는 맹세코 남들에게 나의 세 올케들 흉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흉이 있어야 흉을 보든지 말든지 하지.
흉이라고 생각하면 먼지만 한 것도 흉이 되고 흉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손바닥만 한 것도 아무것이 아니게 된다.(부디 이 구절만은 나의 두 시누이에게 발각되어 주기를...)
그만큼 내가 보기엔 훌륭한 여인들이다.
갑자기 그녀들은 이 시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진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요즘 저런 며느리들 없다.
둘 사이의 문제는 모르겠고, 시월드 입장에서는, 아니 시누이 입장에서만 보더라도 썩 괜찮은 며느리들이다.
나도 다 탐이 나는 며느리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탐이 나도 시누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그녀들에게 생일 축하한다고 전화하거나 문자를 남기는 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