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시누이보다 빨라
< 사진 임자 = 글임자 >
"집에 엄마도 없는데 언니 왔다 갔더라."
엄마는 또 전화하셨다.
자랑하고 싶은 거다.
아니면 딸에게 알려주고 싶은 거다.
이번에도 또 깜빡하고 잊어버릴 뻔 한 그날에 대해서 말이다.
"언니 올 줄 알았으믄 박나물 해 놓은 거 줄 것인디 그랬다. 말도 없이 왔다 가서 온 줄도 몰랐다."
"언니가 또 음식 해 왔어?"
"그래. 아빠 생신이라고 아까 왔다 갔더라. 나 운동하러 나갔다 온 사이에 가고 없더라."
올해는 정말 하나밖에 없는 이 딸이, 내가 아빠 생신을 책임지고(?) 뭔가 해 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내 몸 상태가 일주일째 별로라서 마음만 먹고 신경을 안 쓰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난 사실 아빠 생신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또.
부모님은 항상 생신을 음력으로 지내시니까 안일하게 있다가 부랴부랴 준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번 생신도 며칠 전에 엄마가 살짝 미리 언급하셔서 알았다.
아직 날짜가 많이 남은 줄 알고, 1월 하순경이나 되려나 날짜를 헤아려보다가 속으로 뜨끔했다.
지난주에 큰 새언니가 아빠 생신 얘기를 했을 때도 건성으로 듣고 말았다.
그러니까 며느리들은 매년 바뀌는 음력 생신 날짜를 잘도 기억하는데 딸이라고 하나 있는 것이 맨날 뒷북만 치고 있다.
"벌써 아빠 생신이야? 난 많이 남은 줄 알았는데?"
"이것아, 딸이 돼가지고 아빠 생신도 모르냐?"
"맨날 음력으로 하니까 그렇지."
"언니들은 다 알더라."
마지막 그 말씀은 안 하셨어도 됐을 텐데, 엄마는 기어이 그 말까지 딸에게 하셨다.
하긴, 내가 너무 무심하긴 했지, 엄마 생신도 자주 깜빡했으니까.
생신이란 걸 늦게 알아챈 죄로(?) 아빠의 외손주들 찬스를 쓰기로 했다.
생신이라고 거의 반백 년을 산 딸이 아빠 앞에서 재롱을 부릴 수는 없는 일이니, 외손주들에게 뭔가 미션을 주면 좋겠다고 잔뜩 머리를 굴린 후에 케이크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합의되지 않은 스케줄에 아들은 반발했고 딸은 (내 느낌에)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한 것 같았다.
"얘들아, 외숙모가 벌써 외할아버지 생신이라고 맛있는 음식 만들어 오셨대. 우리도 뭔가 좀 해 가자. 간단하게 케이크 만들어 가는 거 어때? 그냥 맛만 보게 작게 만들자."
전에도 심심하면 케이크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도 비슷하게 흉내를 내봐야겠다 싶었다.
나도 생신 당일에 급히 음식을 몇 가지 준비하긴 했지만 그래도 생신인데 케이크 하나 정도는 있으면 좋겠어서, 게다가 그걸 아이들이 만들었다고 하면 아빠가 더 좋아하시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케이크 그거 하나 사서 가면 그만이지만 부모님 두 분 다 단 음식은 안 좋아하시니까 맞춤형으로 덜 달게 맛이나 보시라고 하자.
다행히 둘째 새언니가 케이크는 안 사 와서 그녀가 준비한 생신상에 케이크만 올리면 될 터였다.
시간 여유가 있었다면 생크림도 직접 만들었겠지만 내가 몸도 아프니 그럴 정신도 없어서 제과점에 가서 있는 생크림을 다 털어 와서 딸기 케이크를 만들었다.
나도 나름 음식 준비한다고 해서 가져갔는데 둘째 새언니가 준비한 음식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엄마, 이거 외숙모가 하신 거야? 역시 누가 한 거랑 다르네?"
아들이 까불었다.
"미역국도 진짜 맛있는데? 이것도 엄마가 한 거랑은 달라."
우리 아이들은 외숙모 음식을 참 좋아한다.
물론 맛이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최근에 새언니도 몸이 안 좋아서 김장 때도 못 왔는데 시아버지 생신이라고 또 진수성찬을 준비해 주니 그 마음이 고맙고 정성이 갸륵했다.
내가 알아서 우리 부모님 생신을 챙겨드리면 좋을 텐데, 자꾸 건망증 심한 시누이 때문에 부모님의 며느리가 고생이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나는 유심히 봤다.
아빠는 내가 해 간 음식보다 둘째 며느리가 해 온 음식에 더 손을 많이 대셨다.
물론 둘째 며느리의 음식 솜씨가 뛰어나서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랴부랴 급조한 딸의 음식보다 미리 정성껏 준비한 며느리 음식이 맛있는 건 당연한 이치겠지.
내가 생각해도 이번에 나의 음식은 좀 성의가 없긴 했다.
우리 4남매의 단체 대화방에 언니가 만들어 온 음식 사진을 올렸다.
"둘째 언니가 아빠 생신이라고 이렇게 음식 준비해 왔어."
큰오빠와 남동생이 반응했다.
정작 둘째 오빠는 그때 취미 활동하러 가셔서 집에 있지도 않았단다.
"OO이 어매가 또 이렇게 음식 많이 해 왔더라."
저녁에 집에 들른 둘째 아들에게 엄마가 얘기하셨다.
"그래? 난 맛도 못 봤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제 아내를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고 나는 느꼈다.)
오빠랑 사느라 고생도 많은데 이렇게 우리 부모님을 살뜰히 챙겨 주는 둘째 언니가 나는 진심으로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
"언니, 이번에도 음식 많이 해 왔던데, 매번 고마워요."
인간적으로 감사의 인사는 반드시 해야 시누이 된 도리이렸다.
"얼마 한 것도 없어요."
둘째 새언니는 별것도 아니라며 답해 왔다.
별 것 아니긴, 그게 다 마음이고 정성이지.
그렇지 않은가.
"나는 어제 또 맛난 거 먹고 왔다."
"또 어디 가셨수?"
"엊그제 음식 장만 해줘서 잘 먹었는디 또 둘째 언니가 같이 점심 드시러 나가자고 해서 오빠네랑 같이 먹고 왔다."
이거 또 엄마가 며느리 자랑하시는 거 맞지?
"엄마는 좋겠수. 둘째 며느리가 그렇게 생각해 주니까."
사실, 내 부모니까 내가 챙겨야 맞는데, 가까이 사는 둘째 새언니가 나보다 더 부모님을 살뜰히 챙기는 것 같다.
덕분에, 좀 미흡한 시누이는 둘째 새언니 덕을 많이 보면서 한 해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