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시어머니 차례죠

고모는 덤이고요

by 글임자
2026. 1. 26.

< 사진 임자 = 글임자 >


"OO이 한 달 동안 할머니 집에 있다가 간다고 하더라."


본격적인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도 전에 엄마는 (내가 느끼기에만)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보를 전하셨다.

드디어,

또,

온다,

엄마의 손자가.

그리고,

또,

왔다,

그 개구쟁이가.



"여름 방학 때 가면서 겨울 방학 때 또 온다고 하더니 진짜로 오나 보네?"

"그런다고 하더라."

"데리고 같이 있을 수 있겠수, 한 달 동안이나?"

"어쩌겄냐, 온다고 하는디 못 오게 할 수도 없고..."

엄마보다 내가 더 의기소침해졌다.

조카가 한 달 동안 머물 집은 고모집이 아닌 할머니집인데 내가 뭐라고?

"고모, 나 또 고모집에 가고 싶어."

아마도 작년 여름 방학 때 우리 집에 와서 한바탕 휘젓고 간 다음에 내게 속내를 비춘 그때가 불현듯 생각나서일지도 모른다.

난 그때 정말 진이 다 빠져버렸다.

그 말을 듣고 본능적으로 한숨이 나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남도 아니고 조카인데, 귀엽다.

귀여운데, 힘들다.

친조카라 예쁘다.

예쁘긴 한데, 힘들다.

내가 데리고 살 것도 아니라 그리 힘들 것도 없다.

그래도 힘들다.


"누나, 이번에도 OO이 내려가니까 그리 알아."

남동생은 신이 나서(내가 느끼기에는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내게 전화했다.

조카가 의무교육을 시작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니까 지금 작년 여름 방학을 보내고 이번 겨울 방학에도 어김없이, 아니 어쩌면 예고했듯이 당연하게 할머니 집으로 한 달 살기를 하러 오시겠다고 했다.

초등 1학년이 뭘 얼마나 힘들게 하겠냐마는, 그래도 나는 미리부터 겁이 났던 건 사실이다.

녀석은 아주, 굉장한 개구쟁이다.

태어나서 그런 개구쟁이는 처음 본 것 같다.

일단 목소리도 크고 아주 활동적이다.

장난은 또 왜 그렇게 많이 치는지, 귀엽다가도 힘이 든다.

그래도 갓난아기도 아니고, 기저귀 갈아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밥도 제 손으로 떠먹을 수 있는 어린이인데 힘들어봐야 얼마나 힘들겠나.(라고 생각은 하지만 막상 실상은 또 그렇지도 않다. 이 대목이 남동생 내외에게 발각되지 않기를...)


엄마도 몸이 안 좋아서 무조건 손자를 대환영할 수만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 며느리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때 그일 때문일 것이다.

이전 글에서 밝혔듯이, 막내며느리는 시부모가 한꺼번에 어깨 수술을 하시자 선뜻 집에서 한 달간 모시겠다고 나서서 정말 지극정성으로 대해줬었다.

나도 막내 올케에게 고마운 마음과 마음의 빚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엄마는 아마 그때 그 일이 고마워서 장난꾸러기 손자를 데리고 있겠다고 하셨을 거다.

"친정 부모도 같이 살기도 힘든디 요새 누가 시부모랑 같이 있을라고 한다냐. 내가 그때 OO이 어매가 한 달간 같이 산 거 절대 안 잊어버린다."

절대 안 잊어버리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때 며느리와의 한 달 살기 이후로 엄마는 더 살뜰히 막내며느리를 챙기고 더 마음을 쓰시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며느리들에게도 소홀한 것도 아니다.

정말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다는 것을 잘 안다.

"그때 나한테 해 준 것이 고마워서 그런다."

엄마는 솔직하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받고만 살면 못쓰지.

뿐이랴, 사장 어른 댁에도 자꾸 뭘 보내신다.

하긴 며느리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도 우리 부모님은 뭐든 보내주실 분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니, 올케. 부모님은 거기서 딱 한 달 있다 오셨는데, OO이 작년 여름 방학 때 여기서 한 달 있었던 걸로 빚 다 갚은 거 아니었어? 깔끔하게 끝난 거 아니었냐고? 이번에 또 온다고? 이러면 공평하지 않은 거 아니야?"

라는 시누이짓 같은 말은 나도 절대로 하지 않았다, 물론.


맞벌이라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을 안다.

"OO이가 학원은 안 간다고 하고, 하루 종일 혼자 집에 못 두니까 보낸다고 하더라. 저도 오고 싶어 하고..."

며칠 전 아빠는 그러셨다.

"여기 오면 저는 당연히 좋겠지. 맨날 놀고. 그러니까 또 온다고 했겠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너무 잘해 주니까 오려고 하지."

아빠는 그저 말없이 웃으셨다.

어린이가 학원은 무슨 학원이냐.

방학 때라도 실컷 놀아야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고모한테 전화해. 알았지? 갈 때 사 갈게."

"첫째, 치킨! 둘째, 피자! 셋째, 돈가스! 넷째, 김밥! 다섯째, 떡볶이!"

조카는 가볍게 다섯 가지만 주문하셨다.

올케에게 연락해서 좋아하는 과일이며 과자 정보를 입수해서 한아름 안겨줬더니 고모는 본 척도 않고 과자만 쏙 빼갔다.

그래도 아직 어린데 집에 가겠다고 떼쓰고 울고 그럴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할머니 집에서 아주 잘 지내는 눈치다.

할아버지에게 한자도 배우고 같이 연도 만들어서 날리고, 매일 산책도 하고 자전거로 시골길을 누비고 다니느라 아주 바쁘시다.

가까이 사는 둘째 오빠네 딸과 어울려서 영화도 보러 다니고 외식도 하고 눈썰매도 타느라 집 생각 같은 건 다 잊어버렸나 보다.

급기야 제 아빠로부터 이참에 시골로 전학 가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래, 한창 놀 때지. 지금 안 놀면 언제 놀아 보겠어.


"벌써 한 달 다 갔네. 다음 달에는 외가에 간다고 했지?"

"간다고는 했는디 진짜로 갈란가 모르겄다."

엄마는 (내 눈에만) 심란해 보였다.

애초에 친가와 외가에서 한 달씩 반반 돌봄을 하기로 했던 거였다.

"그래도 이번에는 외할머니 집에도 가니까 좀 낫겠네."

어쩌면 그게 엄마의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믄 나도 좀 낫제. 내가 두 달 데리고 있을라믄, 아이고..."

엄마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셨다.

그런데, 이를 어쩐다?

지금 조카를 보면 여기서 평생 눌러살 것 같은 분위기다.

할머니와 고모가 어서 2월이 오기를 은근히 손꼽아 기다리는 줄은 모르고.

(부디 이 진심이 조카에게는 발각되지 않기를.)

지금 분위기로는 전입 신고 마치고 당장 이장 사후 확인서를 들고 이장님이 기습 점검을 하더라도 떳떳할 것 같다.


"너 집에 안 가고 싶어?"

"네!"

"엄마랑 아빠, 안 보고 싶어?"

"네! 네! 네네네!"

대답은 참 우렁차기도 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고 말이다.

이러다가 올여름방학에도 또 한 달 살기 하러 오는 거 아니야?

이 고모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 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학기마다 돌아오는 조카의 방학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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