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Jun 03. 2023

부활절 댤걀을 받고 의심했다.

험한 세상에서 사는 요령

2023. 5. 25.

< 사진 임자 = 글임자 >


"이 달걀 먹어도 될까?"

"왜? 삶은 거니까 그냥 먹으면 되지 않아?"

"아니, 요즘 좀 그렇잖아. 저번에 뉴스 봤지? "

"아! 애들한테 이상한 거 줘서 먹인 거?"

"아무튼 진짜 세상 너무 무섭다."

"그러게. 우리 애들한테도 누가 뭐 주면 절대 받지 말라고 계속 말하는데."

"이것도 좀 찝찝하다. 일단 안 먹어야겠다."


그때가 부활절 무렵이었고, 친구와 길을 걷다가 웬 낯선 이에게서 삶은 달걀을 두 개씩 받았다.

처음엔 친구나 나나 배고프던 차에 잘 됐다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제동을 걸었다.


"요즘 뉴스 보면 진짜 세상 무섭더라. 너도 그 뉴스 봤지?"

"학생들한테 무슨 음료 준 거 그거?"

"응. 진짜 별 일이 다 있다. 이렇게 험해서 어떻게 애들 키우겠어?"

"우리 애들은 학교 끝나면 학원에서도 나와서 전단지랑 먹을 거 같이 주더라. 난 그것도 절대 받지 말라고 그랬는데 애들은 아직 철이 없으니까 사탕이나 과자 같은 거 들어 있으면 어쩔 땐 먹기도 하는 것 같아. 그것도 집에 와서 말을 해야 내가 알지 말 안 하면 나도 모르고 넘어갈 때도 있고. 그렇게 받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고 해도 말이야."

"학원에서 그런 것도 같이 줘?"

"응. 어디는 양말도 주고 행주도 주고 그러던데?"

아직 미취학 아동을 기르고 있는 친구는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표정이었다.

행주뿐이랴?

어느 날은 라면도 받아 온 적도 있었다.

학원 홍보하는 것도 좋지만 그 안에 먹을 것 좀 안 넣었으면 좋겠다. 그걸 나눠 준 사람들이 진짜 학원에서 나온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유통된 건지도 확실하지 않으니 뭔가 개운하지 않다.

어느 날엔가는 한 종교 단체에서 아들에게 홍보물을 나눠주면서 거기로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듣고 혹 할만한 먹을거리를 미끼로 내세웠음은 물론이다.

내가 아무리 매일 조심하라고 강조하고 주의를 단단히 줘도 항상 따라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내 경우만 하더라도 그날 삶은 달걀을 별생각 없이 덜컥 받아버리지 않았던가.

친구 말을 듣고 보니, 그때 그 댤걀을 준 사람이 수상쩍게도 보였다. 모자와 마스크로 온통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옆에 지나가고 있었는데 딱 우리 둘을 겨냥해 그것들을 주었다. 그렇게 자꾸 미심쩍게 보려고 드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또 정말 종교인이었는지 모를 일인데 나 혼자 삼류 소설을 쓰는 건지도 모른다.

그는 나를 구원하고자 하려 했던 게 아니라 온통 의심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을 뿐이다.

달걀은 받지 말고 좋은 말씀만 듣고 지나칠 걸 그랬나 보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손을 내밀어 그것을 꽉 부여잡았으니 이렇게 민망할 데가.

이렇게도 인간은(엄밀히 따지자면 나란 인간은)  물질 앞에서 본능적으로 약해지는 것 같다.


"얘들아, 학교 끝나고 집에 올 때 모르는 사람이 먹을 거 주거나 뭐 주면 절대 받지 마. 요즘 나쁜 사람들도 있거든. 뉴스 보니까 저번에 학생들한테 음료수에 뭐 타서 줬대. 받으라고 해도 절대 받지 마. 안 받겠다고 해. 알았지? 혹시 받더라도 절대 먹지는 마. 배고파도 집에 와서 엄마가 해 주는 거 먹어. 엄마가 집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엄마가 할 수 있는 음식이면 다 만들어 줄게. 아무튼 아예 안 받는 게 상책이야. 알겠지?"

내가 꼭 극성스러운 엄마라서가 결코 아니다. 아이들에게 같은 말을 여러 번 지겹도록 해도 뉴스를 보면 별의별 흉흉한 일들이 다 일어나니 자꾸 상기시켜 주는 수밖에.

남편도 한창 뉴스에서 떠들썩했던 그 사건을 다룬 뉴스를 내게 보내면서 아이들 단속 잘하라며 치를 떨었다.


간혹 믿음을 배우기 전에 의심하는 방법을 먼저 터득하며 사는 요지경인 세상이다.

내 이웃, 지인, 심지어 가족까지도 믿지 못하는 이런 세상을 사는 어린이들이 일부 파렴치하고도 무지막지한 어른들이 닿을 수 없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만 살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과잉보호라기보다 요즘 세상이 어느 면에서는 사람을 극성스럽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세상이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믿지 못할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힘을 나 스스로 기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있나. 무엇보다도 나를 지켜 줄 사람은 바로 내가 되어야 하므로, 가장 믿을 만한 사람 또한 나 자신이어야 할 것이므로.

작가의 이전글 그런데 의원님, 손은 왜 잡으시는 거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