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주말 오후였다. 희진은 하루 종일 밖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다 땀범벅이 되어 집에 들어왔다. 대문간에서 마루까지 한 달음에 뛰어 들어가며 신발 짝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희진에게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선머슴 꼴을 해가지고 이제야 기어들어오는 거냐?" 마루에는 발바닥에서 난 땀과 흙이 뒤범벅된 시커먼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다. "계집애가 조심성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덜렁거리기는. 빨리 발 안 씻을 거야?" 쏘아붙이는 엄마의 시선을 피하며 마당 한 쪽 구석의 수돗가로 나가 손발을 씻었다.
엄마는 늘 소리를 지르거나 싸늘한 눈초리로 쏘아보면서 희진의 하는 짓거리들(엄마의 표현에 따르면)을 못마땅해했다. 아니면 무표정으로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희진의 마음속엔 엄마에 대한 거리감이나 두려움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살기 시작한 건 1년 전부터였다. 10년 동안 할머니와 살다가 아빠, 엄마와 여동생 희원까지 같이 살게 되어 식구가 많아졌고 넓은 한옥집으로 이사를 왔다. 희진은 엄마가 무서웠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늘 할머니가 계셨고, 할머니는 든든한 보디가드 같은 존재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날 있었던 모든 에피소드를 다 할머니에게 풀어놓아야 했고 입이 근질거려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는데 엄마는 그런 희진이 못마땅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주둥이를 잠시도 쉬지 않는다거나 시끄러워 죽겠다는 말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엄마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서워할 것도 없었다. 늘 할머니 뒤로 숨을 수가 있었으니까.
그날은 엄마의 꾸지람에 괜스레 서러운 척 입을 삐죽거리며 최대한 처량한 표정으로 수도꼭지 아래에서 느릿느릿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왔다. 집에서 입는 편한 파자마 차림이 아니고 양복바지에 흰색 와이셔츠를 입은 말쑥한 차림의 아버지를 보고 희진은 소리쳤다.
"아빠, 어디가?" "친구 만나러."
"나도 따라갈래."
"가긴 어딜 기어 나가? 곧 저녁시간인데. 발에 발동기가 달렸나. 종일 밖으로만 싸돌아 다니고 또 나가?"
엄마의 날 선 비난이 귀에 콕콕 박혔다.
점심 먹고 나서 오후 내내 술래잡기며 고무줄놀이에 정신없이 빠져있다가 저녁밥 먹을 시간에야 들어온 희진은 자기에게 하는 말인가 싶었다.
"그 여자 되게 말 많네. 볼 일이 있으니까 나가는 거지. 친구랑 저녁 약속 있으니까 그렇게 알어. 희진아, 따라갈래?" "정말? 응!"
희진은 신나서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뒤집힌 채 한 짝은 댓돌 위에 또 다른 한 짝은 그보다 아래 마당으로 나가떨어져 있던 운동화를 아무렇게나 급하게 신고 폴짝거렸다. 이번엔 슬리퍼가 한 짝씩 제 멋대로 나가떨어졌다. 엄마가 방문을 쾅 닫으며 뭐라고 속사포처럼 퍼붓는 말엔 관심도 없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간 어두컴컴한 레스토랑에서 처음 만난 그 여자는 키가 작았다. 10살인 희진보다 살짝 컸는데 그것도 10센티미터쯤은 되어 보이는 하이힐 구두를 신은 것이었다. 짙은 마스카라와 색조 눈 화장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새하얀 여자의 얼굴은 TV 속 광고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화려한 화장에도 불구하고 결코 예쁘다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독특했다. 화장으로 커다랗게 강조된 눈, 낮은 코와 튀어나온 입. 치아는 반듯했지만 한가운데 두 개의 윗니는 살짝 틈이 벌어져 있었다. 터질 듯한 가슴과 커다란 엉덩이는 주말의 명화에서 봤던 금발의 여배우를 떠올리게 했다. 할머니나 엄마, 가까이서 사는 고모, 동네의 이웃집 아줌마들에게서는 본 적이 없는 화려하고 풍만한 외모에 묘한 반감을 느꼈다.
"네가 희진이구나, 아빠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아빠랑 많이 닮았네, 호호호... "
여자는 아버지랑 회사 일로 잘 아는 사람이라고 했고 이것저것 별로 중요한 것 같지도 않은 질문을 했다.
"몇 학년이니?" "동생은 몇 살이야?"...
희진은 '얘기 많이 들었다면서 그것도 모르나?'라고 생각하면서도 대답을 열심히 하며 밥을 먹었다.
양식집에서 오므라이스를 먹는 기회는 흔하지 않았다. 뜨거운 볶음밥을 감싸고 있는 노란 달걀과 그 위에 뿌려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갈색 소스가 만들어 낸 맛의 조합은 환상적이었다. 생일인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집안에 누구도 종교는 없었다)도 아닌데 이게 웬 횡재인가싶어 접시에 코를 박듯이 하고는 열심히 숟가락으로 밥을 퍼 입으로 날랐다. 최대한 오므라이스의 처음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숟가락을 직각으로 세워서, 달걀이 벗겨지지 않고 밥을 덮은 채로 잘리도록 집중하면서... 한 접시 가득 담긴 1인 분의 밥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었다. 아버지와 그 낯 선 여자는 희진이 모르는 누군가에 대해 식사 중간중간 얘기를 이어나갔고 맞은편에 앉아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웃는 시선을 피해 빈 접시만 바라보고 있는 희진에게 여자는 물었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먹을래?"
레스토랑에서 나왔을 때 밖은 깜깜한 밤이었고 번화가의 상점에서 나오는 불 빛과 자동차의 해드 라이트로 눈이 부셨다. 한 손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여자의 손에 잡힌 채 무작정 걸으면서 잡힌 손을 빼내려고 애썼지만 더욱 꼭 잡아 쥐는 여자의 손이 가하는 악력에 그만 굴복하고는 잠자코 걷기에만 집중했다. 한참을 걷다가 옷가게 앞을 지나면서 여자가 말했다, 옷을 사주고 싶다고.
"아니 뭘 그런 걸..." 하며 아버지가 말렸지만 여자는 어느새 희진의 손을 잡아끌고 옷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 같았으면 새 옷을 사준다면 야호 소리를 지르며 신나서 뛰어다녔을 희진은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싸늘하게 눈을 흘기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고 동생 희원도 있는데 제 것만 새 옷을 사서 들어가도 되는 건지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동생 옷도 사주세요라고 말할 만큼 숫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 말은 고모나 삼촌한테도 쑥스러워서 못하는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한 편으론, 동생은 놔두고 자기만 아빠가 데리고 나가서 맛있는 밥과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옷까지 얻어 입는다는 것이 혼자서 특권을 누리는 것 마냥 기분이 우쭐해지기도 했다. 둥근 레이스 칼라가 달렸고 반짝이는 공단 리본을 묶을 수 있는 연보라색 블라우스를 고르고 나자 여태 부담스럽기만 하던 여자가 처음보다는 조금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집에 들어가면서 아버지는 누굴 만났는지 식구들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했고 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뭐라고 말할 처지도 아니었다, 누군지 몰랐으니까. 아버지와 둘만이 아는 어떤 비밀을 갖게 되었다는 것, 아버지가 동생은 안 데려가고 자기 혼자만 데려갔다는 것에서 뭔가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 같은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 정도였다. 어딜 다녀왔는지 누굴 만났는지 엄마는 묻지 않았고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말 한마디 없이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할머니랑 한 방을 쓰는 희진은 할머니에게만 소곤소곤, " 오므라이스랑 아이스크림 먹었어. 아빠 친구가 옷도 사줬어" 하고 자랑하듯이 말하면서도 건넌방이 신경 쓰였지만 곧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새 블라우스를 입고 학교에 가는 희진을 보고 희원이는 "나도 새 옷 사줘!"라고 소리 지르며 울어댔고, 다음에 사주겠다는 말로 동생을 달래면서 엄마는 희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 연보라색 블라우스는 희진이 가장 좋아하는 옷이 되었다. 흰색 스타킹에 반바지 또는 청색 스커트와 매치해서 운동화를 신거나 발등을 덮는 가느다란 끈이 달린 까만 구두를 신어도 잘 어울렸다.
친구들도 선생님도 예쁘다고 칭찬해 줄 때마다 우쭐해졌지만 집에서는 아무도 그 블라우스를 예쁘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진은 그 블라우스를 자주 입었는데, 문제는 둥근 레이스 칼라의 양 끝이 만나는 네크라인의 한가운데 지점에 묶인 까만색 공단 리본이 자꾸 풀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리본은 수업시간에 희진이 입에 물고 빨거나 앞니로 잘근잘근 씹고 있을 때가 많았다.
말을 하거나 친구들과 뛰어놀 때가 아니면 어느새 희진은 리본 끝 자락을 입에 물고 있었는데, 밖에서 들어와 옷을 갈아입지 않고 TV를 보거나 만화책을 읽는 동안에도 쪽쪽 빨고 있다가 어른들한테 꾸지람을 듣곤 했다.
축축하게 침에 젖은 채 풀려있는 리본을 어느 날 가위로 싹둑 잘라 버리고 나서 희진은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