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로 땅을 밟는 것이 건강에 얼마나 좋은지, 어디에 어떻게 좋은지,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에 관한 책과 유튜브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0여 년 전에도 한바탕 매스컴을 타고 알려졌지만, 아무리 좋다고 떠들어도 주변에 맨발로 흙을 밟고 걸을 만한 곳이 없었다. 아파트촌인 동네의 산책길은 자갈 투성이었고 심심찮게 유리 조각이나 뾰족한 물건들이 밟히곤 했으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 목디스크 증상으로 고생하고 있던 남편은 한동안 시멘트 바닥이건 지압용 돌이 깔린 둘레길이건 가리지 않고 주말이면 아파트 주변의 공원과 산책로를 맨발로 걸었다. 그러다가 발바닥에 상처가 나기도 했었고 병원과 병원 밖의 이런저런 치료법들을 넘나들면서 걷기에 대한 열정은 시들해지고 말았다.
작년 말부터 가끔 찾아오던 허리의 통증이 한 달 전엔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을 만큼 심해진 나는, 한동안 어깨와 손, 목 할 것 없이 근육통과 신경성 통증으로 힘들어하는 중에 종일 누워서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목 디스크, 허리 디스크에 더해 원인 모를 (MRI와 다른 여러 가지 검사로도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 감각 이상과 통증 때문에 검색과 강의 시청을 하다 보니 맨발로 걷기에 대한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뭐든 해 보자는 마음으로 주변에 맨발로 걸을 만한 곳이 있는지 검색해 보았다. 예전과 다르게 맨발 전용으로 흙길을 만들어 놓은 곳이 많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집에서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차로 15분 거리) 시민공원에 맨발 코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장은 통증 때문에 걷는 것 말고는 아무런 운동도 할 수가 없으니 건강에 좋다는 맨발 걷기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모처럼 마음먹었으나 유난히 긴 장마에 8월 중에도 비가 오는 날이 많았고, 출근하는 날엔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자주 가지는 못 했다.
그래도 틈이 날 때마다 걸어보기로 하고 몇 번 가보니 참 좋다는 생각이 들어 '이 동네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하는 부러움도 생긴다.
걸으면서 느끼고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 참 다양한데 그동안 잊고 살아온 수십 년 전의 기억까지도 어느 순간 반짝하고 떠오르는 것이 신기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살짝 치켜들고서 허리의 C자 커브를 유지하며 걷기로 작정했으나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부드러운 흙만 깔려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장대비에 흙이 씻겨 내려간 딱딱한 바닥에서는 모래입자보다 굵고 거친 흙에서부터뾰족한 작은 돌멩이들이나 부러진 나뭇가지 등이 밟혀서 발바닥이 아프다.
그런 작은 장애물들을 피해서 걷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고개 숙임은 어쩔 수가 없었는데 땅을 내려다보니 작은 벌레들과 새끼손가락 굵기만 한 지렁이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지렁이를 보고도 징그럽다는 생각보다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지 않고 볕에 말라죽지 말고 무사히 땅 속으로 들어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걸 보니 내가 오래 살긴 했나 보다. 반백년이면 오래 살았지...
내가 대여섯 살 무렵에 살았던 집의 마당은 온통 흙바닥이었는데 비가 오고 난 다음이면 온 마당에 지렁이가 가득했다. 나가 놀고 싶어서 신을 신고 댓돌에서 마당으로 내려서는 순간 기겁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많던 지렁이가 다 사라지고 난 후에도 수돗가의 세숫대야를 들추면 한 두 마리의 지렁이가 꿈틀거렸고 물을 받아 놓는 커다란 통 속에는 물속으로 들어간 지렁이 몇 마리가 바닥에 미동도 없이 가라앉아 있어서 세수를 하려다 말고 비명을 지르곤 했었다.
걷다 보니 이번엔 쐐기벌레가 눈에 들어왔다.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초록빛 벌레들이 쉼 없이 어딘가로 기어가고 있었다. 낙엽들로 덮인 평평한 바닥에서 나무그늘 쪽으로 잘 이동하고 있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빗물이 고여서 만들어진 진흙 구간에서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깊게 파인 발자국 속에 갇혀 뱅뱅 돌고 있거나 셀 수 없이 많은 발자국들 사이사이로 진흙더미가 마치 성벽처럼 높게 솟아 있는 곳에서 그 성벽을 따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놈들도 보였다.
연둣빛, 밝은 초록빛, 검은빛이 도는 어두운 초록빛에 크기도 다양한 쐐기벌레들을 관찰하며 걷다 보니 문득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기억의 나래가 펼쳐졌다.
지금처럼 무더운 여름, 한낮의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아이들은 커다란 나무의 그늘을 찾아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거나 공깃돌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딱지치기를 하기도 한다. 하굣길이지만 곧장 집으로 가는 아이들은 없다. 온몸이 땀범벅이 되고 손등으로 쓱 닦아낸 얼굴은 검은 땟물 자국이 남지만 아무리 더워도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 즐겁다.
갑자기 곳곳에서 꺄악꺄악 하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여자애들은 도망가기 바쁘고 남자애들은 깔깔거리며 뒤를 쫓아간다. 커다란 쐐기벌레를 여자애들의 머리나 등에 멘 책가방 위에 던져놓고 좋아 죽는 남자애들과 소리를 지르거나 우는 여자애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그때 난 내 머리 위에도 징그러운 벌레가 얹혀있을까 봐 기겁을 하고 펄쩍 뛰며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댔지만 소리는 절대 지르지 않았다. 잽싸게 가방을 벗어 벌레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가방을 휘둘러 같은 반 개구쟁이 남자애들을 향해 휘둘렀다. "니들, 죽을래? 이리 안 와?" 소리 지르며 쫓아가는 나를 피해 이제 남자애들이 도망을 다녔다. 내친김에 어깨 높이까지 다리를 쭉쭉 뻗어 특기인 발차기까지 하고 덤비니 다들 도망을 간다. 다가오다가 몇 대 걷어차이고 도망가고 다시 다가왔다가 또 도망가고... 그러면서 어느새 우리들은 학교를 벗어나 집이 있는 동네까지 다다른다.
끝까지 놀리고 도망가는 몇몇 애들을 향해 "니들 내일 학교에서 죽을 줄 알아!"라고 엄포를 놓으며 씩씩대는 나도 사실은 벌레가 너무나 무섭고 싫었다. 무서워한다는 내색을 했다가는 수시로 벌레 세례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지만 온몸엔 소름이 돋고 울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었다.
맨발로 걷다가 발견한 쐐기벌레들
남자애들은 여자애들을 놀리는 재미로 학교에 다니는 것 같았다.
고무줄을 하고 있으면 연필 깎는 칼로 쓰윽 고무줄을 끊어버리고 도망을 갔고, 정글짐을 오르내리며 술래잡기를 하고 있으면 치마를 들추고 낄낄대며 잽싸게 도망을 갔다. 그래서 치마를 입고 등교한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 다가와 "아이스깨끼!" 하며 치마를 들출지 모르는 애들을 경계하느라 제대로 놀지도 못했다.
나는? 원피스 안에 체육복 반바지를 입었다. 그래서 마음껏 뛰어놀았고 마음껏 발차기를 해댔다.
"악! 으악!" 비명을 지르며 내 발길에 엉덩이나 등짝을 맞으면서도 짖꿎은 애들은 끊임없이 나와 친구들이 노는 주변에서 얼쩡거렸다.
물론 내가 선머슴처럼 뛰어놀기는 했지만, 사실 남자애들이 마음먹고 싸우려고 했다면 쩔쩔매며 맞았을 리도 없고 정말 아팠다면 낄낄거리며 도망갔다가 다시 다가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나 "아이고, 허리야!" 하는 신음소리를 꾹꾹 삼켜가며 맨발로 조심조심 흙길을 걷다가 쐐기벌레를 발견하자 떠오른 추억이다.
그 시절 나한테 얻어맞고 다녔던 개구쟁이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