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 선생님 반의 생일파티

난생처음 생일파티

by 엘 리브로

1980년. 희진은 4학년이 되었다.

담임 선생님은 키가 크고 대머리에 늘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큰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말투와 재치 있는 농담으로 수업시간 내내 아이들을 웃게 만들었다. 3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늘 찌푸린 인상에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를 가졌는데 공부 잘하는 아이들과 부잣집 아이들만 예뻐하는 것이 너무 티가 났다. 숙제나 준비물 검사를 하면서 매를 때리거나 칠판을 바라보고 서서 반 친구들에게 엉덩이를 내놓고 엉덩이로 이름 쓰기를 시켰다. 매와 벌이 무서워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선생님의 지시에 잘 따랐다.

매월 첫 주 토요일엔 그 달에 생일이 있는 친구들의 합동 생일 파티가 있다. 1교시부터 4교시까지 종일 수업을 하지 않고 장기자랑이며 게임, 선물 주고받기 등으로 아이들은 신이 났다. 희진은 4학년이 된 지금까지 한 번도 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학생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선물해 준 선생님을 만난 적이 없었다. 사실 TV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봤을 뿐인 생일파티를 희진은 새 학년이 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경험하게 됐다. 동네 친구들과 옆 반 친구들도 희진의 담임 자랑에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희진은 매 번 앞에 나가 노래를 불렀는데 스스로 나갈 만큼 무대체질은 아니었지만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부추기면 뒤로 빼지 않고 씩씩하게 나갔다.


오늘은 "5월 생일파티"가 있는 날이다. 어린이날이 생일인 희진은 집에서 선물을 한 번 밖에 못 받는 것이 늘 불만이었지만 아침부터 방방 뛰며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면서 등교 준비를 했다. 오늘 무슨 노래를 부를지 생각하며 이 곡 저 곡 불러본 것이다. 지난 주말에 아버지가 사 준 청색 주름치마와 조끼 세트 안에 연보라 블라우스를 입고 카맬 색의 가죽 샌들을 신었다. 새 옷과 새 신, 그리고 생일 파티라니! 책가방에 책과 노트가 아닌 과자를 챙겨 넣으면서 콧노래가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시끄러워 죽겠구만, 저 놈의 입은 가만히 있질 못하네." 엄마의 잔소리는 한쪽 귀로 들어왔다가 다른 쪽 귀로 나가버렸다.

아침마다 머리를 양 갈래로 묶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귀 위쪽에 맞춘 양 쪽 묶음의 높이가 달랐던 것이다. 뒤에서 한 갈래로 묶을 만큼 길지 않았고, 풀고 다니기엔 어중간한 길이에, 앞가르마를 탄 머리카락들이 금세 헝클어져 얼굴을 다 덮게 되기 때문에 양쪽으로 묶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한 번도 머리를 묶어주지 않았다. 할머니가 가끔 묶어줄 때도 있었지만 높이가 안 맞다고 짜증내고 몇 번씩 묶었다가 풀었다를 반복하는 데 지쳤는지 신경 쓰지 않기로 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오늘은 어제 미용실에 가서 짧은 단발로 잘랐기 때문에 머리를 묶느라 힘들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더 신이 났다.


1교시엔 생일 파티의 주인공인 학생들이 앞으로 나가 섰고 친구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담임 선생님이 준비해 온 몇 가지 게임과 퀴즈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2교시는 친구들의 장기자랑 시간이었다. 희진은 '어린이날 노래'를 불렀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주로 노래나 익살스러운 춤을 추던 아이들의 순서가 끝나자 선생님은 다른 특별한 장기가 없는지 아이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희진은 옆 자리 짝꿍이 갑자기 "희진이가 재밌는 얘기 알아요"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박수소리와 환호에 떠밀려 교탁으로 나갔다. 가슴은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해댔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노래라면 뭘 부를지 생각해 둔 것이 있어서 몇 곡이라도 부를 수가 있었지만 이야기라니? 원망하는 눈으로 짝꿍을 쳐다보자, "너 이야기 재밌게 잘하잖아. 그거 있잖아, 어제 소설책 읽고 얘기해준 거."라고 또랑또랑 얘기하는 것이다.


아, '흰 엄니'. '화이트 팽'이라는 제목의, 인간에게 길들여진 늑대에 관한 이야기다. 하굣길에 친구랑 수다를 떨다가 며칠 전에 사촌 오빠한테서 빌려와서 재밌게 읽었던 소설의 내용을 얘기했었는데 다시 듣고 싶었나 보다. 친구와 둘이서 떠들 때와는 다르게 희진은 마치 구연동화를 하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남자가 눈 덮인 벌판을 썰매를 타고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썰매는 여섯 마리의 개들이 끌고 있었어요. 어둠이 내리면 배고픈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무섭게 밤하늘을 뚫을 듯이 울려 퍼지고 썰매를 끄는 개들도 무서워서 낑낑거리며 모닥불 주변으로 다가와 몸을 떨었어요..." 희진의 이야기에 아이들은 모두 집중했고 담임 선생님도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 서류 같은 걸 펼쳐놓고 일을 하다가 어느새 손을 놓고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띠기도 하면서 간간이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이야기를 하는 희진도, 듣고 있는 학생들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소설 속 세상에 푹 빠져 있다가, 한 시간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에 모두 깜짝 놀라 현실 속으로 돌아왔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 쉬는 시간이다"라고 말하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아아아, 조금만 더요!" 하는 학생들의 애절한 외침들에 묻혀버렸고, 복도와 운동장에서 들리는 쉬는 시간의 정신없는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 친구들은 희진의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며 숨죽인 채 열중하고 있었다.


다음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선생님은, " 아쉽지만 이야기의 남은 뒷부분은 다음에 듣기로 하자."며 희진이 독점하고 있던 장기자랑 시간에 다른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음에 이어질 내용이 너무나 궁금해서 다른 친구의 노래나 춤을 감상할 마음이 없는지 계속해서 선생님을 조르며 응석받이처럼 투정을 부렸고 마지못한 선생님의 허락으로 희진은 다시 교탁으로 나갔다. 마치 영화를 보듯 장면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니 수업 끝 종이 울리도록 결말까지 다 마치지 못했다. 하굣길에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옆에 따라와 "그래서? 그 담엔 어떻게 됐어?" 하고 물으며 결말을 듣고 싶어 하는 몇몇 열성 친구들에게 운동장 한쪽에 위치한 등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마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친구들로부터 받은 선물들이 너무 많아서 가방에 가득 담고 양손에 가득 들고서도 손이 모자라 짝꿍인 수정이가 집까지 들어다 주었다. 졸업할 때까지 써도 다 못 쓸 만큼 많은 노트와 연필을 한 아름 안고 집으로 가는 길은 발걸음도 가벼웠고 노래가 저절로 흥얼거려졌다.


"나도, 나도 줘."

방바닥에 펼쳐놓고 쌓아놓은 노트며 필기도구들, 온갖 예쁜 메모지와 그림카드, 작은 손지갑과 손안에 쏙 들어가는 앙증맞은 인형들을 보고는 동생 희원이 자기가 갖겠다고 떼를 썼다.

"안돼! 선물 받은 건 소중한 거야. 줄 수 없어."

그래도 엄마의 눈치를 슬그머니 보던 희진은 똑같은 표지의 줄공책 여러 권 중에 하나를 희원에게 내밀었다.

"이거 가져."

"싫어, 안 이뻐. 캔디 책받침 가질래!"

"안돼, 그건 하나밖에 없잖아. 그럼 이 연필 가질래?"

"싫어, 테리우스 공책 줘!"

"안된다고.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데..."

결국 희원의 울음바다로 초토화된 저녁 시간, 엄마가 여섯 살 희원의 등짝을 때리며 방으로 끌고 들어가 혼내는 소리가 들렸다. 희진은 밥을 먹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고 그런 상황에 화가 났다.

"아따, 선물도 많구만 하나 주지 그러냐?" 할머니의 말씀에 괜히 심술을 부렸다. "자꾸 내가 좋아하는 것만 달라고 하잖아! 나도 갖고 싶다고! 내 선물이라고!"


친구들한테서 받은 새 노트들을 크기에 맞추어서 책꽂이에 정리하고 수첩이며 메모지 세트와 필기구들을 서랍에 가지런히 넣었다. 여러 가지 과일향이 나는 지우개 세트도 희원이 탐냈지만 주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 예뻐서, 향기가 너무 좋아서, 쓰기도 아까워 서랍 안쪽에 넣어두고 감상할 생각에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캔디 색칠놀이 그림책이나 줘야겠다. 색칠놀이는 이제 유치해...'


다음날 희진이 학교에서 돌아오니 희원은 캔디와 테리우스, 안소니의 환한 웃는 모습이 그려진 책받침과 손가방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봐라, 엄마가 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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