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공원을 산책하며 나무가 예뻐 사진을 찍다가 프로스트의 시가 생각났다. 나에게 갈림길은 늘 그 시가 떠오르게 한다.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영문으로 처음 읽고 눈물이 났었다. 아니, 처음으로 그 시가 가슴속을 파고들었던 순간이 있었다. 학창 시절엔 무심히 힐끗 보고 지나쳤던 그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했었다.
큰 아이가 입학을 하고 둘째가 어린이집에 들어가자 난 방송대 영문과 3학년에 편입을 했고,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스스로 선택해서 할 수 있었다. 영미 문학을 공부하면서 읽었던 프로스트의 시는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으나 처음으로 내 마음을 울렸다.
나의 눈물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이거나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였는지도 모른다.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무엇이 그 시에 깃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선택한 길에 대해서 많이 원망했었다. 우리 집이 가난한 것은 아버지의 잘못된 선택들 때문이었다고 늘 불평했었다. 물론 마음속으로 말이다. 차라리 말로 표현했더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영화나 TV 드라마 속에서 사람들은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잘도 하던데 현실의 나는 정작 하고 싶은 말들을 평생 못 해봤다.
나는 너무나 참는 것에 길들여져 있었다. 불만을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참아내다가 곪아 터질 지경이 되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아팠다.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했어야 했다. 10대 시절의 나는 아버지와 엄마와 싸웠어야 했다. 싸움이 두려워서 말 못 하고 가슴속에 담아두기만 했던 것들은 증오심이 되어 20대, 30대의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정점에 이르러 우울증에 걸리고 나서야 내 삶을 되돌아봤다. 그러나 40대의 나는 새로운 희망을 안고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해야 할 말들을 하지 못했다. 엄마에게 평생 말을 걸어보지 못한 채 엄마의 죽음을 맞았고 엄마와의 갈등은 그렇게 '공소권 없음'처럼 끝나버렸다.
아버지는 왜 저쪽 길을 선택하지 않고 이쪽을 선택했었는지 물어봤어야 했다. 아버지의 이유들을 들어봤다면 나의 선택들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아마 달랐으리라.
할머니의 사업이 실패하자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게 되었을 때, 고모들은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교사 양성 과정을 거쳐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악착같이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평생을 교직에 몸담았다.
아버지는 대학을 중퇴하고 나서 방황의 시기를 거쳤던 것 같다. 여자를 만났고 헤어졌고 그 과정 중에 태어난 나를 할머니에게 맡겼으며 또 다른 여자를 만나고 가정을 이루고 직장을 구했다.
나는 40년 동안이나 생모의 존재를 알면서도 모른 채 했고 만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 가지 않은 길이 생겼고 나는 왜, 왜, 왜?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해봤다. 마음속으로만.
어느 날 문득 아버지와 대화하고 싶어 졌는데, 이제는 거부당하거나 혼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너무 늦어진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치매의 진행 속도가 빨랐고 대화를 이어 나가기 힘들어졌다. 그나마 10여 년 전에 용기 내어 아버지에게 생모의 소식을 물어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작년 이맘때 아버지의 기억은 점점 더 현시점에서 멀어졌고 당신의 유년시절을 어제의 일처럼 회상하고 오늘과 50년 전을 구분 못하게 되었다.
왜 다른 길로 가지 않았느냐고 아버지를 원망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한다, 무수히 많은 가지 않은 그 길 위에는 내가 없을 수도 있었겠다고.
아버지는 한 번도 후회의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후회한들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도 없을 테니 그냥 묵묵히 앞으로 걸어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영원히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갈림길의 왼쪽이다. 산책로의 갈림길은 걷다 보면 다시 만난다. 오른쪽 길은 더 커다란 원을 그려야 한다. 두 길이 만나는 지점에선 또 다른 갈림길이 나온다.
누구나 매 순간 선택을 하며 살고 나 또한 나의 선택에 따라 지금 서 있는 길 위에서 서성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