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준비를 하면서 마음이 분주해졌다.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살아온 짐들의 무게에 눌린 듯 가슴이 답답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고민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가장 큰 짐은 피아노. 딸아이가 6학년 때 대회에 나가면서 장만했던, 벌써 우리 집에서 15년의 나이를 더 먹은 갈색의 중고 피아노다.
첫 아이가 두 돌쯤 지났을 때 고모는 사촌들의 성화에 못 이겨 피아노를 처분하기로 결심했고 결국은 나에게 주었다.
1970년대 후반에 장만한 피아노였으니 30년 이상 나와 인연이 있었던 셈이다. 그 까만색 피아노는 사촌 여동생들의 무관심 속에 짐짝처럼, 방 한구석에 장롱과 벽면 사이에 세로로 끼어, 틀어박혀 있었고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사촌들을 방문했을 때만 한 번씩 연주되었던 것이었다.
너무 오래된 디자인이라 전체적으로 모든 모서리 부분에 각이 졌고 온통 새까만 판판한 몸판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어둡고 무겁게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한 때 아르떼 피아노라는 이름으로 피아노의 몸판에 밝은 색의 기하하적인 무늬가 들어갔었던 것이 생각나서 원색의 시트지를 커다랗게 세모, 네모로 오려 붙였더니 그나마 분위기가 밝아졌다.
시트지를 오려 붙인 구식 피아노 앞에서 큰아이가 은물을 가지고 놀고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피아노 학원에 다닌 아이가 잘 사용했지만 고학년이 되어 연주곡의 수준이 올라가면서부터는 좋은 피아노로 바꿔주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소리가 맑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 산 중고 피아노는 처음 가졌던 까만색 피아노보다 훨씬 경쾌한 디자인과 밝은 색이 마음에 쏙 들었다.
중고인데도 200만 원을 훌쩍 넘는 가격이었지만(15년 전에 지불한 가격이... ) 여러 날 고민하면서 다양한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려 본 아이와 남편도 만족스러워했다.
그렇게 우리 집에 들어온 피아노는 살림살이 장만에 별 취미도 감각도 없는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품위 있어 보이는 가구처럼 의젓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덕분에 딸이 연주해주는 베토벤과 쇼팽의 명곡들, 영화나 드라마의 OST와 이루마의 작품들을 내가 원할 때 들을 수 있는 호사를 누려왔다.
이사 가기 전날 우리 집에서 마지막을 보낸 피아노. 오래된 독주곡집은 40년 전 내가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부터 우리 집의 피아노는 침묵의 시간을 몇 년이나 보내게 되었다.
그래도 학생이었던 때는 집에 올 때마다 "엄마, 뭐 쳐줄까? 뭐 듣고 싶어?"라고 묻고 틈만 나면 피아노 앞에 앉았던 딸도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차츰 피아노와 멀어지고 말았다.
내가 어쩌다 한 번씩 건반을 두드려 보며 추억에 잠기기도 했으나 나의 피아노 실력은 40년 전 체르니 30번 수준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새로운 곡을 연습할 시간도 끈기도 없었던 데다가 시력도 이젠 노안이 와서 새로운 악보를 보고 싶지 않은 탓이 크다.
세월이 흐르니 집안의 인테리어에서도 한몫을 차지하던 피아노의 존재감이 어느새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내가 결혼 전에 남동생에게 사줬던 피아노가 그랬고, 그 피아노를 내 친구의 막내아들을 위해서 줬었는데 몇 년이 지나자 똑같은 처지가 되었다. 나의 첫 월급으로 샀던 그 피아노에 대한 애정 때문에 남 주지 말라고 친구에게 신신당부는 했었지만 이미 딸을 위해 산 피아노가 있는 우리 집에 갖다 놓을 수도 없는 일이니 하나마나 한 말이었다.
마음을 비워야 했다. 물건은 물건일 뿐이다. 물건을 버린다고 추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도 피아노에 대한 집착이 컸던 것일까?
내가 정말 피아노를 갖고 싶어 했지만 집안 형편상 고가의 피아노를 들여놓을 수가 없었을 때 아버지의 심정.
자식들이 아무도 피아노를 치지 않지만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었던 고모의 마음.
나의 취업으로 피아노를 들여놓고 막내아들의 연주에 흐뭇해했을 나의 아버지...
그리고 나...
아버지는 고모네의 까만색 삼익피아노를 우리 집 3남매에게 중고로 사주고 싶어 했었다.
그러나 고모는 피아노 치는 것에 전혀 흥미가 없는 3남매들을 향한 희망을 버리지 못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선생님으로 시골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연주했던 오르간 대신 언젠가는 당신이 직접 피아노를 연주할 날에 대한 로망이었는지 오랜 세월 그 피아노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했었다. 결국엔 내가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고 나서야 갖게 된, 고모의 애장품이었던, 까만색의 삼익 피아노...
지금의 아이들은 대부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 피아노를 배운다. 음악이나 피아노 연주에 대한 흥미가 있든지 말든지 일단은 피아노에 입문해서 음악적 재능이 있는지 보고 아니면 악보라도 읽을 수 있으면 된다고 모든 엄마들은 생각한다.
내가 초등학교(당시의 명칭은 국민학교였다)에 다닐 때는 정말 부잣집 아이들이나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피아노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고모네 집에 피아노가 있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TV에서나 봤던 피아노가 마냥 신기했던 나에게 사촌 여동생은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다닌다며 '도레미파솔라시도'를 건반으로 누르는 신기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사촌 여동생의 피아노 레슨을 따라가서 본 나는 매일 아버지를 졸랐다, 나도 피아노 배우고 싶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시절이었는데도 아버지는 나에게 피아노 배우는 것을 허락했고 난 정말 열심히 피아노를 배웠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고모집에 방문할 때면 신나게 피아노를 쳤다.
아버지에게 들려드리고 싶어서 더 크게 더 세게... 내가 연주하는 곡들은 모두 포르테나 포르티시모로 도배된 것처럼 온 손가락에 힘을 주어 건반을 두드렸다.
대학교 3학년 때 어느 날, 초등생이었던 막냇동생의 피아노 대회에 따라갔다가 남동생의 연주를 듣고 눈물이 났던 기억이 있다. 고만고만한 수준의 비슷한 소나티네 곡들의 연주를 계속 듣다가, 남동생의 또록또록 야무진 터치의 거침없는 연주를 듣고는 대견함에 목이 메었다. 집에 피아노가 없었기에 한 번도 남동생이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나는 감격이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 떠올렸었다.
내가 첫 직장에서 첫 월급을 타자마자 아버지는 새 피아노를 할부로 구매했고 10개월 동안 난 그 할부금을 갚았다. 나와 열세 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은 초등학교 6년 동안 피아노를 배웠고 집에서도 늘 연주를 했다.
내가 번 돈으로 새 피아노를 사서 동생이 마음껏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아이의 피아노 실력이 일취월장하면서 좋은 피아노를 사주고 싶었고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맘에 쏙 드는 피아노를 발견해서 구매한 것이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아이가 대학생이 되고 졸업하여 직장인이 되고 떨어져 사는 세월 동안 우리 집의 피아노도 먼지를 둘러쓰고 조용히 자리만 보존하고 있어 온 지 몇 년이 되었다.
이제는 치매를 걱정하여 피아노를 다시 쳐볼까 하는 생각을 한 지도 몇 년인데 사실 내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은 1년에 고작 서너 번, 서너 달에 한번 꼴이다.
그런데도 언젠가는 이루마의 피아노곡 하나쯤은 완벽하게 연주해야겠다는 포부를 안고 산다.
이사가 내일모레인데 아직도 피아노의 처리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피아노의 덮개를 열었다. 그것도 벌써 한 달 전의 일이다.
새 집의 거실엔 거실장의 옆자리가 절반쯤 비어있다. 클래식 피아노의 자리를 메꿔 줄 디지털 피아노의 자리다. 큰 아이가 휴가라도 얻어서 집에 오면 함께 피아노 매장에 가서 소리 좋은 녀석으로 데려다 놓을 작정이다. 그러면 나는 또 매일 숙제처럼 그 녀석을 쳐다볼 것이다.
'오늘도 시간이 없어서 못 쳤네... 내일은 꼭 30분이라도 피아노를 치고야 말겠어!'라는 다짐을 매일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