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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 리브로 Jul 31. 2022

믹스커피와 이별하기

이별 연습 중...

커피를 처음 마셔본 것은 고3이 되고 난 직후 3월의 어느 오후였다.

같은 반 친구인 K가  오후 자율학습 중간 쉬는 시간에 사물함에서 커피를 꺼냈다.

커다란 유리병에 든 맥심 가루커피와 프리마(커피 크림)를 각각 두 스푼씩 가득 퍼서 컵에 넣고 보온병에 담아 온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때까지 난 커피란 술과 마찬가지로 어른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왔고 한 번도 마셔 볼 생각을 못했었다.

커피를 마시면 오후에 졸림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에 나도 한 잔 타 달라고 해서 마셔봤다.

처음 마셔 본 커피는 너무나 쓴 맛이 강했지만 점심 식사 후의 나른한 몸과 몽롱한 정신을 깨어줄 것이라 믿으며 나도 매일 오후에 한 잔씩 커피 마시기에 돌입했다. 커피는 원래 그렇게 쓰면서도 뭔가 맹맹한 맛인 줄 알았고 K의 커피와 프림의 비율이 절대적인 것인 양 고3이 다 가도록 그렇게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셔도 오후 시간이면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고 머리는 어찌나 무거운지 제대로 목을 가누기가 힘들어 꾸벅꾸벅 졸기가 일쑤였다. 쉬는 시간에는 어김없이 책상에 엎어져 비몽사몽 헤매면서도 공부에 대한 미련은 있었는지 연필을 꼭 쥐고 노트에 뭔가를 난해하게 끄적거리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나서 보면 가관이었다.

국어 교과서에 영어 단어가 여기저기 쓰여 있고 영어 참고서에는 수학 문제풀이가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휘갈겨져 있었다.

커피를 안 마셨다면 어땠을까? 오후에 커피를 마시지 않고도 하교시간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한 채 커피에 의존하게 됐다. 오후 수업시간에 졸면서도 억지로 눈을 부릅뜨고 깨어있으려고 애쓰며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어쩌면 커피 덕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3 시절부터 즐겨 마시게 되었던 가루커피와 프림

 



대학에 들어가서는 자판기의 커피를 마시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하루에 한두 잔의 커피를 뽑아서 마시며 한 학기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극심한 위통을 느꼈다. 제산제를 먹고 나서 가라앉았던 통증은 커피가 들어가자마자 다시 고통을 주었다. 별 수 없이 커피를 끊었다.

커피를 끊은 지 한 달쯤 되었던 어느 날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던 나의 눈에 차창밖으로 커피숍의 모습이 보였다. 유리문 안쪽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 커피를 마시며 재잘거리는 대학생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면서 몹시도 커피가 그리웠다. 이미 위의 통증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그동안 참았던 커피에 굶주린 배를 채우기라도 하듯이 대접 가득 커피를 타서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난 두 다리가 후들거려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하고 수전증 환자처럼 두 팔을 떨었고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는 체험을 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동생은 그날의 광경을 묘사하며 웃음을 터뜨린다.


지금은 길에서든 카페에서든 아메리카노 아니면 카페라테를 마시는  사람들이 나이를 불문하고 넘쳐난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타서 먹었고 카페의 테이블 위에는 설탕과 프림이 각각 담긴 통이  놓여 있었다. 비율은 조금씩 달랐지만 누구나 설탕과 프림을 넣었는데 난 고3 때 친구에게서 배운 커피 덕분에 설탕을 넣지 않았고 자판기에서도 늘 설탕 커피가 아닌 림 커피를 뽑았다.


직장 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고 중년의 나이가 되는 동안에도 나는 커피를 마셨다가 위가 아프면 한동안 마시지 않기를 반복하며 살았다. 변한 것은  따로 사서 섞어 먹었던 가루커피가 아닌 믹스커피로 대체된 것이다. 여전히 아메리카노는 쓰기만 할 뿐 왜 마시는 건지를 모르는 나는 믹스 커피를 라테로 구매하고 제품에 따라 쓴 맛이 강하면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서 커피를 타 먹는다. 나의 위장은 여전히 한 번씩 쥐어짜듯 아프고 길면 1주일쯤 짧게는 3~4일쯤 커피를 안 마시면 다시 통증은 사라진다. 그러면 또 나는 믹스 커피를 점심 식후에 마신다.




커피프림, 지금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지만 식물성 경화유라는, 콜레스테롤을 높인다는, 악명이 높은 인공 크림을 먹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난 여전히 믹스 커피를 즐긴다. 흡연이 폐에 안 좋은 줄 알면서도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나 알코올이 간에 안 좋은 줄 알면서도 술을 마시는 애주가처럼 말이다.


커피의 카페인은 우리 몸의 부신피질 호르몬과 비슷한 작용을 해서 결과적으로 호르몬의 분비에 이상을 초래하게 되고 많은 현대인들이 부신피질 호르몬의 부족으로 인한 부신피로 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한다.


2년 전 극심한 피로감으로 일상이 힘들었을 때 검사를 해보니 나의 부신피질 호르몬의 수치가 정상보다 한 참 낮았다. 커피를 끊고 호르몬 약을 먹으면서 탄수화물을 줄이는 식생활을 6개월 동안 하고 나자 몸에 활력이 생겼다.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겼고 새로운 직업에 도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다시 매일 믹스 커피를 마시고 밤늦게까지 깨어있는 생활이 반복되자 나의 몸은 신호를 보내오고 있다. 정말 통증이 심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커피를 며칠 동안 안 마셔 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피곤함으로 쓰러지는 일도 없고 꾸벅꾸벅 조는 일도 없다. 밤에는 좀 더 일찍 잠자리에 들 수도 있고 숙면을 취하게 된다. 그런데 통증이 다 가라앉았다고 느끼는 순간 커피의 향이 너무나 그리워진다. 뿐만 아니라 점심을 먹자마자 커피 한 잔을 어서 마시지 않으면 극심한 피로감 때문에 서 있을 기력조차 없을 것만 같다. 


나는 매일 커피를 생각한다. 커피가 해로운 이유와 내 몸의 신호를 낱낱이 열거하면서 마음속으로 늘 저울질한다. '오늘은 커피를 마실까 말까? 끊기는 끊어야 하는데 오늘만 마지막으로 마실까?'

지금도 나의 심장은 자신의 존재를 새삼 강조하듯이 쿵쾅거리고 가끔씩 속 쓰림을 겪는다.

오늘 낮에도 뜨거운 우유에 믹스 커피를 타서 마셨다. 믹스 아닌 가루 커피를 우유에 타면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커피 하나 끊지 못하는 정신력으로 무얼 할 수 있겠니?'라며 자책하는 내 모습이 우습다.


그냥 끊자. 지금 이 순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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