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조금만 아프면 좋겠어

나의 사촌 여동생

by 엘 리브로

사촌 여동생이 있다. 나에게 아낌없이 주고 싶어 했던 착한 동생...

언니인 내가 베풀어도 모자랄 판에 늘 내가 준 것보다 몇 배를 더 되갚고야 마는 동생이다.

우린 유년기를 함께 보냈다. 나에게 친남매들이 있고 저도 친언니와 친오빠가 있지만 우린 각자의 부모와 남매들과 떨어져 할머니의 손에 컸다. 둘 다 젖먹이 때부터 분유를 먹고 자랐다.

나는 부모님이 헤어지면서 친할머니의 손에 맡겨졌고 사촌 여동생(정확히 말하자면 고종사촌)은 작은고모가 시골 국민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세 아이를 돌보기가 힘들어 막내가 백일이 지난 후 친정어머니에게 맡긴 것이었다.

나의 유년기의 기억 속에는 늘 사촌 동생이 함께 있다. 우리 둘은 할머니가 엄마였고 서로에게 가장 친한 자매였다. 동생이 대여섯 살 무렵 고모가 옆동네의 학교로 발령이 났고 학교 근처로 이사를 왔지만 여전히 우린 함께 살았다.


사촌 동생이 2학년, 내가 5학년이 되었을 때 우린 처음으로 헤어지게 되었다.

동생은 다시 시골 학교로 발령이 난 자기의 엄마를 따라 전학을 갔다.

나도 할머니와 함께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고 전학을 했다. 우린 자주 만나지 못했고 시골 학교의 농번기 휴가 때나 명절에 한 번씩 만나서 신나게 놀았다. 나는 사촌들과 지내는 시간이 너무나 좋았고 사촌들이 집에 오면 아침에 머리나 배가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종일 온 집안과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대고 술래잡기나 숨바꼭질을 하고 카드게임을 했다. 아프다며 결석을 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신나게 뛰어노는 나를 할머니는 나무라지 않으셨다.


사촌 오빠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사촌 여동생들도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고모는 아파트를 사서 사촌들과 할머니를 함께 지내게 하면서 주말에만 집에 왔다. 할머니가 살림을 하면서 손주들을 돌보시게 된 것이다. 난 중3이었던 늦가을에 처음으로 부모님과 두 동생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동생들은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에 사춘기의 관심사를 함께 나눌 대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놀아 온 사촌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았고 할머니를 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나는 자주 고모집에 갔다. 주말에 가서 놀고 월요일 아침에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때로는 그냥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때로는 사촌들과 수다를 떨고 싶어서, 또 가끔은 지독한 감기에 걸려 아프고 기운이 하나도 없을 때 할머니 생각이 더 간절해서... 하굣길에 갑자기 고모집으로 가는 시내버스에 올라타기도 했다.


우리들은 각자의 아픈 가정사를 갖고 있었지만 함께 있을 땐 어둡지 않았다.

학교에서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고 단체 영화관람을 할 때면 사촌 동생들을 데리고 갔다.

친한 친구와 만날 때도 데리고 다녔다. 나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추억 속 장면에는 사촌들이 자주 등장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결혼 한 우리들은 첫 아이를 낳는 순간에도 친정 엄마가 아닌 서로의 보살핌을 주고받았다. 아이를 낳고 바로 다음날 퇴원해서 일상생활을 혼자 꾸려나가야 했던 나에게 달려와 첫 조카의 기저귀를 맨손으로 빨면서 옆에서 도와준 동생이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바쁜 와중에도 조카가 보고 싶다며, 도심에서 벗어난 허허벌판에 막 들어선 아파트 단지에 위치한 교통 불편한 나의 집에 자주 찾아왔던 동생...

동생이 첫 아이를 낳을 때 나는 난산으로 고생하는 동생의 분만실에 들어가 손을 잡아주었다.

아들 둘을 낳아 키우면서 힘들 때마다 나에게 와서 밤에 우는 아이를 내게 맡겨두고 단잠을 자던 동생.

동생에게는 친정 엄마가 계셨으나 평생 직장생활에만 열심이었고 살림이 서툴고 살갑지는 않았던 엄마보다 사촌인 내가 더 편하고 의지가 됐다. 우린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코맹맹이 소리로 "형부~~~"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인사하는 동생에게 남편은 똑같은 톤으로 "처제~~~"하고 반겨주었다. 대학 시절 남편과 만나는 자리에서 고등학생인 사촌을 보아서인지 늘 아기 같다며 처제를 귀여워하던 남편이 한동안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을 했었다. 그때 형부 기분전환하게 차 바꾸는데 보태라며 천만 원을 송금해 준 동생은 암 투병 중이었다. 지금도 동생은 복막에 전이된 암과 싸우고 있다.


몇 년째 독한 항암요법으로 고생하고 있는 동생은 한동안 암세포가 거의 사라졌다가 다시 상태가 악화되면 다른 항암제로 바꾸기를 여러 번 했다.

작년 여름 동생이 말했다. "언니야, 나 더 안 좋아졌어. 이제 더 써 볼 항암제도 없대... 이번엔 연명치료에 대해 이야기하더라..."

가슴이 먹먹했다. "어떡해..."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냥 앉아서 끝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너무나 젊은데, 아직 대학도 안 간 두 아들이 있는데... 동생의 치료를 위해 주 2회 서울을 오가며 헌신적으로 보살펴 오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제부는 어떡하라고...

아이들이 다 컸으니 이제 우리끼리 자유롭게 여행도 다닐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날이 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1년 이상 얼굴을 못 보고 사진으로만 항암치료 중인 동생의 모습을 봤을 때 난 깊은 슬픔에 빠져버렸었다. 보고 싶고 안아주고 싶었으나 가까이 갈 수가 없었고 나누어 먹고 싶은 먹거리가 있어도 경비실에 놔두고 돌아서야 했었다.


작년봄부터는 서로가 코로나에 이미 걸린 경험이 생겼고 거리 두기도 거의 해제가 되면서 언제든 동생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지만, 독한 항암제 때문에 많이 힘들고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도 어려워하니 자주 방문하지 못했다. 더 이상 쓸 약이 없다는 S대학병원 측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방의 다른 대학병원으로 옮겨 다시 항암을 시작한 동생. 먹는 것마다 토해낸다는 동생에게 지난 명절 연휴 때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는데 다행히 연휴가 끝난 후 위장 증상이 가라앉아서 조금씩이라도 먹는다고 했다.

뭐가 먹고 싶으냐고 만들어 주겠다고 했더니 멸치볶음이 먹고 싶단다.

"멸치랑 또, 다른 건?"

"콩나물..."

"감자채 볶음은 어때?"

"응, 그것도..."

겨우 먹고 싶다는 게 기본 반찬이다. 속이 편하지 않으니 담백한 것이 먹고 싶은가 보다. 살쪄야 한다며 고기를 먹이는 제부의 노력이 무색하게 먹는 것마다 다 게워내고 말았으니 동생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고 미안했을까?

새벽 배송으로 받아볼 수 있는 식재료를 몇 가지 주문해서 이것저것 반찬을 만들어서 가져갔다. 기운 없는 몸을 식탁의자에 간신히 기대고 먹는 둥 마는 둥 몇 수저 뜨는 동생을 보며 슬퍼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만 슬퍼졌다. '감사해야 하는데... 이렇게라도 버텨주고 있어서 고마운데...'


늘 소녀처럼 풋풋하던 동생의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지고 웃음이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수술과 방사선 치료 후 3년 만에 전이된 암으로 이후 꼬박 3년을 항암치료에만 매달려 왔지만 암세포는 항암제에 반응하여 사라지는 척하다가 어느 순간 급속하게 퍼져있기를 반복했고 약은 몸의 모든 기관들을 공격해대고 있다. 진통제로 하루하루 버티는 동생의 기운 없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뜨거운 슬픔을 삼켜야 한다.

전에 단독으로 썼을 때 효과가 없었던 항암제를 최근에 다른 항암제와 섞어서 맞은 후 암수치가 떨어졌다며 좋아하는 제부의 말에도 마냥 기뻐할 수가 없다. 항암제 주사를 맞는 다른 지역의 대학병원이 아닌 동생집 근처의 병원에서 매일 외래진료를 받으면서 항생제를 맞고 때로는 수혈을 받기도 하면서 지내온 지난 두 달 동안 동생의 상태는 더 안 좋아지고 있다. 걸을 힘도 없어서 진료실에서 넘어지고 집에서 화장실에 가다 넘어지기를 몇 번.

일요일인 어제 가서 보니 얼굴 여기저기에 상처가 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먹는 것도 만사가 다 귀찮아진 탈진한 환자의 모습이다. 이제는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아무것도 먹기 싫다고 한다. 만들어서 가져간 음식들도, 과일도, 과일을 갈아서 만들어준 주스도, 안 먹겠다며 인상을 찌푸리고 먹이려는 제 남편에게는 흐느끼듯 소리를 지른다.




가끔 비슷한 꿈을 꾸었다. 어린 시절 우리가 함께 살았던 기억 때문인지 사촌 동생이 나오는 꿈이다.

대여섯 살 정도의 동생을 내가 업거나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다가 동생을 놓치거나 함께 넘어지거나 했다.

실제로는 그런 경험이 없었고 늘 안전하게 집안에서 함께 놀았는데 꿈속에서는 동생을 잃어버리고 통곡했다.

울면서 잠에서 깨고 나면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무나 여리고 인형처럼 예뻤던 어린 시절의 동생을 떠올리기만 해도 아련한 슬픔이 올라오곤 했다. 동생이 아프기 훨씬 전부터 그런 꿈을 꾸었다. 어린 딸들을 키우는 동안에도 아이들이 나오는 꿈은 거의 없었는데 사촌 동생은 가끔 그렇게 꿈속에 나와 우린 서로를 기다리고 애타게 찾고 슬퍼하곤 했다.


최근엔 다른 꿈을 꾸었다. 제부의 전화를 받는 꿈이다. "안돼! 싫어! 전화받지 않을 거야.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 나는 제부의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려고 몸부림치며 잠에서 깨어난다. 제부가 나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



지난여름에 동생은 말했다, "이렇게라도 계속 살고 싶어. 병원 다니면서 항암제 맞으면서... 그냥 이대로만 살 수 있다면..."

그때 난 생각했다, '이대로 말고 지금보다 건강해지면 좋겠어. 너랑 다시 여행을 가고 싶어. 옆에서 귀찮게 구는 아이들 없이 우리끼리 오손도손 옛이야기 나누며, 풍경 좋은 곳에서 느긋하게 산보도 즐기고, 이리저리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정말 맘에 드는 장소가 나타나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곳에 실컷 머물러 구경하는 그런 여행 말이야.'


지금은 그 여름보다 훨씬 상태가 나빠진 동생을 바라보며 난 소망한다.

더 아프지 말기를... 여행 따위는 아무래도 좋으니 그저 하루하루 참을 수 있을 만큼만 아프기를.

함께 드라이브하며 수다를 떨고 분위기 좋은 브런치카페의 창가에 앉아 봄 풍경을 바라보지 않아도 좋아. 그건 우리의 추억 속에 얼마든지 있으니...

그냥 너의 안방 작은 발코니에 앉아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들을 보고 비가 오는 날에는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에 더 짙어지는 초록빛을 뽐내는 키 큰 나무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힘내! 은영아,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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