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

내가 기억 못 하는 이야기들의 저장고

by 엘 리브로

작년 봄에 이사를 오면서 결국 30년 이상 묵은 일기장들을 모셔오고야 말았다. 이사하기로 결정이 난 이후 몇 달 동안 머릿속에선 '저것들을 버려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는데 무슨 미련이 남은 것인지 자꾸만 미루게 된 것이다.

오래된 일기장들을 처분해야겠다는 생각은 몇 년 전부터 해왔다. 미니멀리즘의 열풍을 타고 온갖 서적들과 방송프로그램에서 "비움"의 미덕을 강조할 때마다 집 안 곳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잡동사니들과 함께 버려야 할 물건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나의 일기장들이었다.

큰맘 먹고 정말 버리기로 결심한 날에도 박스째 그냥 들고나가면 될 것을 한 권씩 꺼내서 훑어보다가 결국은 제 자리에 다시 집어넣었다. 매번, '아냐, 다음에 차분히 읽어보고 나서 버리자.'라고 생각하며 일기장이 담긴 박스를 붙박이장의 맨 위 선반에 낑낑대며 올려 두었다.

그러나 차분히 앉아 일기장을 펼쳐 읽을 시간은 좀처럼 나지 않았고 어느새 일기장의 존재는 또 잊혀갔다.


이삿짐을 싸기 전 딸들에게 내 일기장들을 버리겠다고 하자 큰 아이는 잘 생각했다며 같이 들고나가자고 했다.

작은 아이는 펄쩍 뛰었다.

"뭔 소리야, 엄마? 그걸 왜 버려? 엄마의 역사잖아!"

"역사는 맞지. 그런데 다시 보고 싶지도 않은 어두운 시절, 우울한 얘기만 잔뜩 있어."

"그래도 놔둬 봐. 나중에 쓸 데가 있을 수도 있잖아."

"글쎄... 너무 오래돼서 좀벌레도 기어 다니고... 팬트리도 좁은데 공간 차지하고..."

"아, 뭐 좀벌레도 있고 집먼지 진드기도 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어차피 울집 짐들 장난 아닌데 그 종이박스 하나 더 있고 없고는 차이도 안 난다니까!!"


고3 시절, 담임 선생님과의 소통의 창이었던 학습 플래너.


작은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새집에 들여와 팬트리의 선반에 올려놓은 일기장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한 번 꺼내어 읽어 본 일이 있다. 아무것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펼치자 중학교 3학년 시절의 내가 있었다.

내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느 날의 이야기가 가슴에 그리움 한 조각을 불러왔다.

복잡 다난했던 그 시절의 슬픔과 울분, 내 아픔만 바라보느라 친구의 시선을 외면했던 이야기가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전혀 생각이 나지 않게 된 일들이...

사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억의 저장 창고에 깊숙이 들어가 웅크리고 있다가 다시 소환되어 나오는 순간들이다.

일기장은 바로 그 오랜 기억의 창고를 여는 열쇠가 된다.


차라리 기억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일들도 있다. 다시 떠올리기엔 마음이 너무 아픈 이야기들이...

그러나 과거의 나를 다시 마주하리라는 걸 안다. 지금 가진 마음의 평온이 깨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래된 나의 일기장을 펼치려 한다.


과거의 나와 만나는 일이 지금의 나를 더 잘 알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라 믿고 있다.

언젠가는 사라질 유한한 나의 생명처럼 나의 수십 년 전의 묵은 감정들의 흔적도 어떻게든 정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드는 이유는, 내가 하지 않으면 나의 딸들이 그것들을 붙들고 슬퍼하며 버리지도 못하고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봄이 오기 전에...

묵은 일기장을 꺼내어 잊혀진 이야기들을 불러내야겠다. 주인공인 나에게, 이제는 관객이 된 내가 격려의 박수를 보내도 되지 않을까?

잘했어!

잘 이겨냈어.

이만큼 잘 살아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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