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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Sep 09. 2023

"또다시 누군가에게 살기가 느껴졌다."

상념 중 걸려온 전화 1통





오자 마자 머루 포도 한 송이를 씻어서, 씨를 발라내지 않고 그대로 삼켰다. 퇴근 후 집안이 너무 고요하여 침 삼키는 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듯. 아 낮동안은 이렇게 덥구나.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하여 여름이 완전히 우리 곁을 떠난 줄 알았었다. 뭐든지 뮤직이 없으면 안 되는 나는 독서하기 좋은 클래식 틀어줘. 신나는 팝송 틀어줘. 식물이 좋아하는 클래식 틀어줘. 빗소리 들려줘. 늘 인공지능 아리아에게 부탁한다. 아리아는 이럴지도 모른다. 아니 저 여자는 시도 때도 없이 뭐 틀어달래. 제대로 안 틀면 고함이나 지르고.


너무 고요하다. 이 적막을, 포도의 목 넘김을 끝내고 즐기고 싶어 졌다. 집중하려고 하니, 이상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올라왔다. 어떤 시절, 어떤 장소로 나를 데려갈 듯이 주위의 고요가 나를 설레게 했다. 갑자기 볏짚의 향이 올라오는 듯. 어린 내가 시골 마당에 서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마치 나를 중심에 두고 카메라가 돌아가듯이 순간 말하기 힘든 감상에 젖었다. 안 되겠다. 글을 써야겠다. 뭔가를 남기고 싶어서 미칠 정도로 글을 쓰고 싶어 졌다.


사람들은 얘기한다. 좋은 방향으로 가라고 한다. 그리고 천천히 가라고 한다. 목표 지점을 향해 나아가라 한다. 나는 불현듯 반대로 하고 싶다. 좋은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걷고 싶고. 나아가지 않고 그냥 가만히 움직일 힘이 생길 때까지 멈추어 서있고 싶다. 목표지점도 없이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나를 내버려 두고 싶다. 모든 것의 홍수다. 특히 정보는 더 그렇다. 내가 몰라서 못하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 읽을거리도 차고 넘쳐서 대체, 너무 좋은 것들이 넘넘 많아서 어디서, 무엇부터 꺼내서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볼 것도 많고, 가볼 거리도 많고 먹어봐야 할 것도 많다. 그래서 때론 혼란스럽다.


공원에서 뭔가를 시작하려는 듯. 일부러 바깥을 차단한 아이보리커튼뒤 저 밑에서 둥둥거리는 소리가 울려온다. 아 이 고요한 적막을 깨는 소리. 우리는 잠시도 이렇게 멈춰 서서 아무 소리도 들리는 않는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오롯이 나를 위해 써 본 적이 언제였던가. 귀에서 너무 고요해서 [쉥에에에 쉥~]하면서 저절로 무형의 무음의 음절이 연결되는,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본 것이 언제였던가.


그토록 많은 것을 제공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 속에서 현대인 같은, 우리들은 오히려 외롭다.




실시간으로 전화가 울렸다. 오후 2시 13분이다. A학원 매니저 선생님 전화이다.


"어머니 S학원비가 밀렸습니다. 기다려도 입금이 되지 않아 연락드렸습니다."


"바로 계좌이체하겠습니다."


꾸역꾸역 눌러놨던 감정이 폭발하듯이 올라왔다. 또다시 누군가에게 살기가 느껴졌다. 너는 아버지로서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인간이 아니었니. 그렇게 키운 네 부모님이 불쌍하다. 이 전화 1통으로 내 모든 평화가 깨져버렸다. 귓속에서 피가 터져 나올 것만 같다. 쓰려고 했던 모든 언어와 문장들이 다 숨어 버렸다. 또다시 나는 무너지고 있구나. 이 글들이 소설이면 좋겠다. 조금 더 나아진 기분으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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