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삶의 기억

어떻게 기억될까요

by 배유정

한참 난임 시술 때문에 산부인과 들락거리던 때의 기억과, 휴식기의 기억은 참 다른 느낌으로 남아 있습니다. 병원 다닐 때는 의외로 꿈에 젖거나 간절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마누라 모시고 다니느라 바쁘고 정신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나고 보니, 병원 대기실에서 무거운 공기를 마시며 죄인처럼 앉아 있던 시간이 마냥 짧게만 느껴집니다. 시술 중인 아내를 기다리며 모르는 동네를 헤매고 다니거나, 카페에서 커피에 올리브 빵을 먹던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이켜 보면 휴식기, 그러니까 병원에 안 다닐 때 오히려 병원 기억이 더 또렷합니다. 벽의 페인트 색, 대기실 의자들, 복도의 조명, 계단의 높이까지 세세하게 떠오릅니다. 선생님들 표정과 주위의 난임 부부들의 눈빛도 떠오릅니다. 온갖 것들이 쓸데없이 자꾸 떠오릅니다.


이때의 기억들은 대체로 느릿하고 갑갑한 느낌입니다. 생각도 많고 꿈도 많고 간절했지만, 동시에 힘들고 지치기도 했습니다. 마음이 온전치 않던 시기는 회사 일에도 영향을 주었고, 어느새 쌓여버린 부진은 돌이키기 어려웠습니다.


자식을 그리는 마음과 업무의 부담이 버무려지면 매운맛이 나는 모양입니다. 갑자기 사무실에서 나와 연못가에 앉아 하염없이 물결을 바라보거나, 퇴근길 아빠 손 잡고 걷는 남의 자식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또 다른, 새로운 시기입니다. 저명하신 송곳 선생님의 '너희는 어렵다'는 선언을 들은 이후로, 세 가족, 네 가족의 꿈을 거의 내려놓은 시기입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선언하셨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차마 정확히 선언하지 못한 시기입니다. 이 글조차 아내가 읽고 울게 될까 봐 쓰고 싶지 않은, 받아들이기 힘든 시기입니다.


나중에 퇴직하면, 혹은 나이가 많이 들면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될 테니 미리 준비하자는 얘기를 아내와 가끔씩 했었습니다. 답은 정하지 못했습니다. 워낙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노후도 맞기 전에, 마흔 갓 넘어 덜컥 새로운 인생이 들이닥쳤습니다. 무자식 세상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떨어졌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두리번거리기만 하고 있습니다. 앨리스는 토끼 굴에 들어갔으니 토끼나 쫓아가면 됩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됩니다. 그런데 무자식 굴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루하루 흐릿한 것도 당연한 것 같습니다.




사실 비슷한 아픔을 겪은 분들이 많을 것이고, 조언을 구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든 책이든, 의지만 있으면 다정한 안내자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공식적으로 새 삶을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입니다. 안정되지 않음으로써 안정되려고 하는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좀 더 이렇게 지내고 싶습니다. 마트에서 마주친 꼬맹이들에게 인사나 건네면서, 둘이서 수다 떨고 깔깔거리면서, 아직은 괜찮다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지내다 세월이 흐른 후에 지금의 기억을 떠올리면 어떤 느낌일까요. 오라고 한 적 없는 이 인생의 새 시대는, 새 삶은, 어떤 느낌으로 떠오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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