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열쇠

반납하셨는데요

by 배유정

대학생 때 일입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잠시 나갔다 왔는데, 가방이 통째로 없어졌습니다. 누가 잘못 가져갔나 했지만 주위에 있는 가방들은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가방엔 전공 서적과 형에게 빌린 워크맨, 그리고 도서관에서 대출한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가 있었습니다.


없는 돈에 전공책을 새로 사야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천국의 열쇠는 내 것이 아니니 변상해야 합니다. 사서에게 얘기하니, 대출 도서를 반납하지 않으면 졸업이 안 된다고 합니다. 어차피 새로 구해 오려고 했지만 저 말을 들으니 괜히 더 화가 납니다.


같은 책을 구해야 하니 여기저기 서점을 들쑤시고 다닙니다. 인터넷이 잘 발달해 있던 때도 아니라서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여러 서점을 돌며 고생한 끝에 똑같은 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의 열쇠를 받은 기분입니다.


다음 날 도서관에 들러 새 책을 반납하려고 했더니 기가 막힌 소리를 들었습니다. 책이 이미 반납되었다는 것입니다. 고장 난 기계처럼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가방 도둑이 책을 반납하다니. 제목이 천국의 열쇠라서 그랬을까요. 가방은 훔쳤지만 천국에는 가고 싶어서였을까요. 아니면 불쌍한 대학생 졸업은 시켜주려고 그랬을까요.


요즘 같으면 CCTV 뒤져서 범인을 잡는 건 일도 아니지만, CCTV가 흔한 시절은 아니었습니다. 사서에게 캐물어봤자 소득이 많지 않을 것이고, 알아낸 것도 별로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전공 책과 워크맨, 가방까지 하면 몇만 원은 되겠지만 경찰에 신고하기도 좀 그랬습니다. 결국, 세상에 별 일이 다 있구나 하고 받아들입니다.




부모님 몰래 나쁜 짓을 하고,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들을 보면 귀엽기 그지없습니다. 요즘 애들은 어떤지 안 키워봐서 모르지만, 옛날 감성으로 말하자면 돼지저금통에서 동전 빼서 쓰고 다른 걸 채워 놓거나, 안 뜯은 척하려고 개복 수술의 후처리를 정성껏 한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만년 예비 아빠의 로망 중에는 '잘 혼내기'가 있습니다. 이놈~ 한 다음에 예쁜 말로 달래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이 바나나우유 하나씩 물고 놀러 나가면 됩니다. 말이 쉽지 반드시 한쪽이 삐치겠지만, 그래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근원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양심입니다. 엄마 아빠랑 같이 모은 돈으로 까까를 사 먹어도 천국에는 가야겠다는 욕심 때문이 아닙니다. 돼지 개복처럼 자잘한 범죄로 양심의 표면을 조각하다 결국 꽤 큰 덩어리로 작품을 완성했을 때, 서로 기댈 수 있는 가족이 됩니다. 자식 농사 성공입니다.




무자식 팔자에 잘 혼내기 로망은 못 이루었지만, 가방 도둑을 용서함으로써 대리만족하기로 합니다. 천국의 열쇠 반납하신 도둑님, 나중에 천국 가시면 책을 반납해서가 아니라 내가 용서해서일 겁니다. 고마운 줄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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