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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유정 Dec 10. 2021

바람이 맺어준 인연

바람을 참 좋아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것이 얼굴에 와 부비고 지나가는 것이 참 좋습니다. 때론 시원해서 좋고 때론 따뜻해서 좋습니다. 한겨울 따뜻한 방에 있다 나오면 찬 바람도 시원하고, 한여름 에어컨 쌩쌩한 버스에 있다 나오면 더운 바람도 따뜻합니다.


오래 전 어떤 글에서 '사람을 기분좋게 하는 것' 중에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믿을 만한 통계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들 바람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확인받은 기분입니다.


그렇게 얼렁뚱땅 프로포즈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확인도 안 된 인터넷 글에서 바람에 대한 확신을 갖고는 아내, 아니 여친님을 바람쐬러 가자고 꼬셔서 강가로 데려갔습니다. 대충 이런 논리입니다.


바람 = 기분좋음

기분좋음 = 오케이

∴ 바람 = 오케이       (1)


식 (1)에 따라,

바람부는 곳에서 프로포즈

 = 기분좋은 프로포즈

 = 오케이


놀랍게도 실화입니다. 어쨌든 함께 천천히 강물을 보며 산책하다, 몰래 주섬주섬 반지를 꺼냅니다. 그리고 얼굴 앞에 불쑥 내밀며 결혼하자고 뜬금없는 청혼을 합니다. 바람은 배신하지 않고 살랑살랑 불며 여친님의 눈물을 말려 주었습니다. 덕분에 지금 우리는 같이 살고 있습니다.




이 고마운 바람을 자식에게도 알려주고 싶습니다. 살랑살랑 봄바람, 계곡의 찬바람, 바닷가 짠바람, 집안을 도는 공기청정기 바람, 술냄새 품은 아빠바람까지 수많은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어딜 가든 아는 척 해주는,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아는 바람들을.


여친님을 아내로 만들어 준 청혼풍은 이미 십여년 전에 멀리 여행을 떠났습니다. 지금쯤 지구 반대편에서 고양이라도 쓰다듬고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그 바람이 이곳으로 돌아와 새로운 인연을 맺어 주면 좋겠습니다. 황새처럼 날아와 귀여운 아기를 안겨 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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